[책갈피 속의 오늘]1952년 쿠바 바티스타 쿠데타로 재집권

  • 입력 2005년 3월 9일 18시 30분


코멘트
쿠바 아바나의 혁명박물관은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1901∼1973)가 대통령 관저(官邸)로 쓰던 건물이다. 그곳엔 바티스타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을 그려놓은 포스터가 붙어 있다. 포스터엔 각각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독재를 통해) 우리의 혁명이 가능하게 해줘서 고맙다.”

“(쿠바 제재를 통해) 우리의 혁명을 강화시켜줘서 고맙다.”

‘천국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쿠바. 그러나 지정학적으로 쿠바는 미국의 가슴 부근에 도사린 비수다. 반미 정권이라도 들어서는 날엔 몹시 성가시게 된다. 미국은 차라리 독재를 응원했다.

스무 살의 나이에 군에 입대한 바티스타는 1933년 ‘부사관들의 반란’을 이끌며 정계의 유력 인물로 떠오른다. 미국은 곧바로 바티스타에게 특사를 보내 “당신이 쿠바에서 권위를 가진 유일한 인물”이라고 힘을 실어줬다. 반미 정권을 막기 위해서였다.

바티스타는 이런 지지를 바탕으로 꼭두각시 대통령들을 조종했고 실질적으로 쿠바를 통치했다. 그 자신도 1940년 대통령을 지냈다.

바티스타와 미국의 관계는 바티스타가 1952년 3월 10일 쿠데타로 재집권하면서 더욱 깊어진다.

바티스타 재집권기의 쿠바는 극단적으로 미국에 종속됐다. 쿠바 전체 공공사업의 80%, 철도의 50%, 모든 석유사업을 미국이 운영했다. 미국 자본가와 마피아는 바티스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아바나에 카지노와 나이트클럽을 열어 수억 달러를 벌어갔다. 아바나는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매춘도시로 성장했다.

아바나의 밤은 화려했지만 국민들의 삶은 여전히 초라했다.

불행한 시대는 혁명가를 낳는 법.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바티스타의 독재에 마침표를 찍었다. 1959년 1월 1일 미처 날이 밝기도 전에 바티스타는 쫓기듯 망명길에 올랐다. 재집권한 지 7년 만이었다.

미국의 코앞에서 미국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카스트로는 사회주의로 눈을 돌렸다. 소련의 원조로 미국의 기나긴 경제봉쇄를 견뎌냈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자 쿠바는 다시 경제난과 국제적 고립에 시달리고 있다.

혁명의 이념과 경제적 풍요, 둘을 동시에 얻기는 어려운 것일까.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늘 넓기만 하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