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97년 고종 덕수궁 환궁

  • 입력 2005년 2월 24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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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교회를 거쳐 이화여고로 이어지는 길은 서울시내에서 ‘가장 걷고 싶은 거리’로 꼽힌다.

그러나 이 길의 낭만적 정취를 한 꺼풀 걷어내면 이내 정동의 아픈 상처가 드러난다. 한 세기 전 열강들이 한반도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던 곳. 조선조 500년 역사상 가장 기이한 사건 중의 하나로 꼽히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무대 역시 이곳이다.

구한말 고종은 자신이 거처하던 경복궁을 버리고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여 동안 머물렀다. 러시아의 영향력을 이용해 일본의 지배 위협을 막아보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반응은 마치 ‘변심한 애인’과도 같았다.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주도했지만 일본과의 전면적 대립까지는 원치 않았다. 오히려 일본과 ‘조선 공동보호령’ 밀약을 체결한 러시아는 고종에게 환궁 압력을 넣었다.

고종은 주저했다. 일본의 잔인한 명성황후 시해를 지켜본 그로서는 환궁 후 신변보호를 해주겠다는 러시아 측의 확답이 필요했다. 당시 러시아 군사교관 최고책임자였던 푸타타 대령은 “고종이 환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러시아로부터 궁궐수비대 창설 약속을 받고 나서야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덕수궁(당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이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통해 일본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것만은 분명하다. 최근 고종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아관파천을 외국공관으로 도망친 국왕의 나약한 리더십이 아니라 ‘오랑캐(러시아)’로 ‘오랑캐(일본)’를 견제하려는 능동적 정국운영이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구한말 조선에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를 오가며 고난도의 등거리 외교를 펼칠 만한 장기적인 비전과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아관파천 기간 중 조선이 국왕의 신변보호라는 눈앞의 목표에만 매달려 있을 때 러시아와 일본은 외교적 타협을 통해 조선에서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넓혀갔다.

시대와 국력 수준은 변했지만 주변 4강에 둘러싸인 한국의 지정학적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구한말의 역사를 교훈 삼아 얼마나 탄탄한 외교적 역량을 쌓아왔는지 뒤돌아볼 일이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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