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성호]보수의 日新, 진보의 又日新

  • 입력 2004년 12월 9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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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건한 믿음과 자기희생적 실천의지는 분명 정치적 미덕이다. 한국 진보의 역사는 이런 믿음과 실천의 영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구(舊)소련의 붕괴로부터 시작된 ‘배반의 역사’ 속에서 한국 진보가 살아남은 이유 역시 그들의 순교자적 미덕을 우리가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훈장처럼 내세우는 투쟁 경력 앞에 사람들이 그리도 쉽게 주눅 들 리 없다.

한국 진보의 순교사(殉敎史)는 곧 한국 보수의 본보기다. 건국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모든 면에서 역사의 승자로 기록될 것이 자명한 한국 보수가 현재 지리멸렬한 이유도 진보의 역정이 주는 교훈을 올곧게 새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률밖에 모르는 한국 보수에게는 내세울 만한 정치적 미덕이 아직도 없다.

▼‘뉴 라이트’ 이념적일관성 중요▼

그러나 진보의 미덕이 있다면 보수의 미덕도 있는 법이다. 원래 보수주의자란 이렇게 말해도 저렇게 말해도 바꾸지 말자는 사람이 아니다. 첫째, 그는 현실주의자다. 개혁의 이상에 공감하면서도 그 비용을 현실적으로 따져본다. 둘째, 그는 공동체주의자다. 해방의 명분 뒤에 숨어 있는 사익의 준동을 경계하고 공동체의 규범적 통합을 중시한다. 셋째, 그는 원칙론자다. 어떤 물질적, 도덕적 성과도 수단과 과정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믿는다. 넷째, 그는 의무론자다. 항상 권리 주장에 앞서 자기 의무를 돌아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한국에는 진정한 보수가 없었다. 기회주의를 현실주의로, 국가주의를 공동체주의로 호도하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신영달에 일로매진해 온 보수는 보수의 자격이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기득권의 겉치레가 아니다. 그것은 보수적 미덕의 실천이자 보수의 존재 이유다.

그래서 뉴 라이트(New Right)의 출현을 반긴다. 한국 보수의 단순한 세대교체가 아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새로운 보수를 자임하기 때문이다. 또한 순교의 과거에 고착되어 있는 현재 한국 진보가 지적 빈곤을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변화와 자성은 구(舊)보수와 구진보 모두의 몫이다.

그러나 반기는 마음이 조심스럽다. 그 정체성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자유주의, 경제적 시장주의, 외교적 국제주의란 이념들이 왜 우리시대 보수의 근간이 되어야 하는지, 이러한 다양한 구호들이 어떤 일관된 신념체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설명이 충분치 않다. 자유주의의 ‘자유’와 자유시장의 ‘자유’를 논리적으로 등치시키기 위해, 또 ‘공동체주의적 자유주의’라는 개념이 정치적 수사의 차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좀 더 냉철한 숙고가 요구된다. 자유와 시장과 세계의 명분, 그리고 정의와 국가와 민족의 대의를 같이 아우르기 위해서는 좀 더 뜨거운 고뇌가 요구된다. 도대체 무엇이 ‘라이트’인지, 그것이 왜 ‘뉴’인지 좀 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아직은 그렇다. 그렇다면 뉴 라이트 최대의 당면과제는 진중한 자기성찰이다. 하다못해 실천에 대비한 사상투쟁이라도 좋다. 성찰적 보수의 정착을 위해서라면 더 좋다. 보수의 정치적 미덕과 그 실천방안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고 솔직히 대화해야 한다. 시민운동도 문화운동도 그 다음 문제다.

▼섣부른 정치세력화 경계를▼

그런 의미에서 뉴 라이트의 자기성찰의 첫 번째 관건은 올드 라이트(Old Right)와의 차별화다. ‘라이트’에 앞서 ‘뉴’의 정체성을 확실히 다지는 작업이다. 그리고 지금 단계 최대의 적은 성급한 정치세력화에 대한 안팎의 유혹이다. 열정만 가득한 신념의 섣부른 실천은 파산하고야 만다는 교훈을 작금의 진보로부터 배워야 한다. 선명한 차별성과 신중한 행보야말로 도덕적인 보수의 새로운 모습이 될 터이다.

일단은 새로운 보수의 일신(日新)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새로운 진보의 우일신(又日新)을 기다린다.

김성호 연세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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