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63>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9월 21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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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패왕이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제(제)나라를 치러 팽성을 떠났습니다. 패왕이 이끄는 군사는 구강왕(구강왕) 경포(경포)의 군사를 빼고도 10만이 넘는다는 소문입니다. 제왕(제왕) 전영(전영)도 지지 않고 5만군을 모아 성양(성양)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군사는 전영 쪽이 모자라나, 제 땅에서 먼 길을 오는 적을 기다리는 격이니 반드시 전영이 불리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가 양쪽 모두 오래 쌓인 감정이 있어 거록(거록)에 못지않은 피투성이 싸움이 벌어질 듯합니다.>

장량이 관동에 풀어놓은 세작(細作)이 그런 글을 보내왔다. 다 읽은 한왕 유방은 곧 한신을 불러 그 글을 보여주며 물었다.

“대장군은 이 싸움을 어떻게 보시오?”

한신이 그리 밝지 않는 얼굴로 먼저 대답했다.

“항왕이 성난 칼끝을 제왕 전영에게로 돌리게 된 것은 경하드릴 일입니다. 그러나 이 둘의 싸움이 우리가 바란 만큼 대왕께서 천하를 도모하시는데 도움이 될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대장군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보시오?”

“전영이 도읍 임치(臨淄)에 멀찌감치 물러앉아 성벽을 높이고 군량을 넉넉히 해서 기다렸다면 이번 싸움은 대왕께 크게 이로운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항왕은 천리가 넘는 길을 걸어가 지친데다 군량까지 넉넉하지 못한 군사로 굳센 임치성을 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영은 적어도 몇 달은 항왕의 발길을 북해(北海=여기서는 북쪽 변두리 땅의 뜻) 끝에 묶어두어 대왕을 도울 수 있었고, 아주 잘 되면 그 두 마리 호랑이가 모두 상해 대왕의 앞길을 크게 열어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영은 제 분을 이기지 못해 많지도 않는 군사로 천리 길을 마중 나가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성양쯤에서 오히려 제나라 군사보다 적게 걸은 항왕의 대군과 마주치게 되었으니, 그 싸움이 전영에게 좋게 끝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공연히 항왕의 기세만 키워 우리에게로 몰아 보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장량은 한신과 생각이 달랐다. 한신의 말에 금세 걱정스런 표정이 되는 한왕을 달래기라도 하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군의 헤아림이 어련하겠습니까만, 이번 싸움의 끝을 달리 볼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신이 보기에는 설령 일이 그릇되어 제왕 전영이 일찍 낭패를 보는 수가 있어도, 항왕이 쉽게 동북쪽의 수렁에서 쉽게 발을 빼지는 못할 것입니다. 조왕(趙王)을 낀 진여가 머지않은 곳에 만만찮은 기세로 버티고 있고, 연왕(燕王) 장도(臧도)도 함부로 요동왕 한광을 죽인 죄가 있어 항왕을 전처럼 받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제나라 사람들의 굽히지 않는 기질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천하의 시황제도 육국(六國)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그것도 속임수를 써서야 옛 제나라를 제 땅으로 아우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제나라 사람들의 기질과 항왕의 앞뒤 없고 무자비한 병략(兵略)이 부딪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런 장량의 말에 한왕의 얼굴이 조금 풀리기는 했지만 궁금한 것은 오히려 늘었다는 표정이었다. 항왕과 제왕의 싸움 결말을 달리 보는 두 사람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다가, 다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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