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있는 편지]춘향전&신데렐라 콤플렉스

  • 입력 2004년 9월 10일 17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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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부터 ‘안경환-정이현의 느낌이 있는 편지’를 책의 향기에 연재합니다. 50대 후반의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는 인문학과 법학을 넘나들며 ‘법과 문학 사이’(1995년) ‘법과 영화 사이’(2001년) 등 문화 에세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삶의 성찰을 보여 왔습니다. 30대 초반의 여류소설가 정이현씨는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2003년) 등을 통해 남성적 위선과 엄숙주의를 뒤집는 발랄한 상상력으로 2000년대 문제 작가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남성 여성으로 성(性)이 다르고 나이로도 한 세대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은 책을 소재로 사회와 인생과 사랑에 대해 다채로운 빛깔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특히 내면의 고백을 진솔하게 담는 편지 형식의 글은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 큰 울림으로 와 닿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안경환 선생님께.

며칠 사이 하늘이 높고 투명해졌습니다. 선생님이 계시는 대학 캠퍼스의 초가을 풍경은 어떤지요?

문득 얼마 전 제가 만났던 한 여대생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장래 계획이요? 일단은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고 있지만 다 안 되면 확 시집이나 가야죠, 뭐.” 스물한 살인 그녀는 저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그녀는 학교를 졸업한 다음 취직을 하지 못할까봐 굉장히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능력 있는 남자들은 젊은 여자를 좋아하니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결혼하는 게 좋겠죠? 저는 키도 크고 날씬하지만 쌍꺼풀이 없어서 고민이에요. 이번 방학에 알바해서 수술하려고 해요.”

그녀의 야무진 계획을 듣고 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어요. 십 년 정도 앞서 살아온 탓에, 앞으로 그녀가 맞부딪치게 될 세상이 그리 쉽고 만만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쯤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일까요? 구질구질한 얘기만 늘어놓는 소설은 읽지 않지만 재벌2세와 평범한 여성의 러브스토리인 TV드라마 ‘파리의 연인’에는 한없이 열광했다는 그녀를 만나고 돌아와 저는 한동안 우울했습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녀에게 한 줌의 위로도 되지 못하는 소설가로서, 어쩌면 퍽 무기력하다는 느낌을 가졌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즈음 ‘춘향전’을 다시 만났습니다.

‘춘향전’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고전이지요. 그 ‘춘향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100권째 책으로 선정되어 새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좀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과연 그토록 ‘낡은’ 이야기가, ‘세계문학전집’에 당당히 낄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지요. 우리가 한때 ‘세계문학’이라고 이르며 우러르던 문학작품들의 상당수가 실상은 일본을 거쳐 받아들인 ‘서양 근대문학’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저는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춘향전’이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것은 왜곡된 세계문학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의미 있는 사건일 것입니다.

선생님, 훌륭한 고전이란 어느 시대에 읽어도 생생한 현대성을 느낄 수 있다고 했던가요? 다시 읽은 ‘춘향전’은 다원적인 의미망으로 얽혀진 복잡한 텍스트인 동시에, 놀랍도록 현대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작품이었어요. 17세기의 조선 처녀 성춘향이 직면했던 삶의 문제가,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젊은 현대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교묘히 겹쳐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이 처한 제도적 억압과 생존조건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일까요?

표면적으로 ‘춘향전’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나눈 두 청춘남녀의 연애담입니다. 또한 일부종사(一夫從事)의 ‘절개’를 꿋꿋이 지킨 열녀의 이야기이고요. 춘향은 양반가의 도련님을 사랑하고 비밀 결혼식을 올려 버림으로써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조선시대의 봉건적 신분제에 저항한 일종의 투사가 되었습니다.

반면 온갖 환난고초를 겪고도 남편 이외의 외간남자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고 견뎌냄으로써 당시의 제도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정절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순응하기도 했지요.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그 이중적 행위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오늘날의 젊은 여성들에게서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백년가약을 맺은 후 부친을 따라 한양으로 떠나는 도련님 앞에서 춘향이 가히 협박에 가까운 생떼를 부리는 장면이지요. 그것은 연인과의 이별에 슬퍼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존립 근거를 송두리째 뿌리 뽑힌 어린 짐승의 몸부림같이 느껴졌습니다.

선생님, 책을 덮으며 저는 이런 발칙한 의심을 해 보았습니다. 혹시 춘향이 처음에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그네를 탔던 순간부터 한양 도련님을 사로잡기 위한 고도로 계산된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요.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해도 저는 사랑을 이용한 악녀라고 춘향을 비난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평범한 여성이 누추한 현실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잘난 남자를 잡는’ 것밖에 없는 사회라면, 그녀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단순한 허영이 아니라 슬프고 절실한 생존전략일지도 모르니까요.

‘파리의 연인’을 동경하는 젊은 여성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아직도 ‘춘향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너무 우울한 일일까요? 젊은이들을 늘 가까이 접하는 선생님께서는 여성의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사회적 생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정이현 약력

△1972년 서울 생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및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2년 ‘문학과 사회’ 제1회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2003년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문학과지성사) 출간 △2004년 제5회 이효석 문학상 수상

○안경환 약력

△1948년 서울 생 △1970년 서울대 법대 졸업 △1983∼87년 미국에서 변호사 개업 △1987∼현재 서울대 법대 교수 △한국헌법학회장(2001∼2002년)과 서울대 법대 학장(2002년 6월∼2004년 6월)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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