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49>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9월 5일 17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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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펼침과 움츠림(2)

“한왕(韓王) 성(成)이 이렇다할 공도 없이 왕이 된데다, 자방선생 때문에 대왕을 돕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오던 항왕은 그를 팽성으로 끌고 가 열후(列侯)로 낮추고 감시해왔습니다. 이제 여러 가지로 미루어 헤아리건대 항왕이 기어이 한왕 성을 죽이고 자방선생마저 죽이려 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선생이 먼저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급하게 몸을 피하다 보니 홀로 먼 길을 무리하여 달릴 수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 말에 한왕(漢王) 유방은 한편으로는 한왕 성이 가여워 마음이 어두워졌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쁘기도 했다. 망해버린 조국 한(韓)나라에 대한 장량의 집착도 남달랐지만, 한왕 성이 자신이 세우다시피 한 왕이라 장량이 더욱 그에게 집착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한왕 성이 죽었으니 장량은 갈데없이 한왕 유방 곁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항왕이 아무리 포악한들 설마 그렇게 함부로 한왕을 죽이기야 했겠소? 갑자기 쫓기게 된 연유는 자방선생이 오면 듣기로 하고, 당장은 과인의 꾀주머니[지낭]같은 선생을 맞을 채비나 해야겠소.”

한왕은 그런 말로 기쁜 마음을 감추고, 다시 근시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수레를 내어 먼 길 떠날 채비를 하라. 내 몸소 함양까지 가서 자방 선생을 맞이할 것이다.”

말뿐이 아니었다. 한왕은 다음 날로 어가(御駕)를 내어 함양으로 떠났다. 그리고 타다 남은 함양 별궁에 거처를 정하고 장량이 이르기를 기다렸다.

장량도 다음날로 함양에 이르렀다. 수척한 얼굴로 수레에서 내린 장량은 한왕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말하였다.

“이제 아비 할아비의 나라 한(韓)은 다시 망하고, 그 왕실의 핏줄은 끊어졌습니다. 삼대(三代)에 걸친 은의를 갚을 곳도 목숨 바쳐 섬길 주인도 없어졌으니, 신(臣) 량(良)이 어디다 이 외로운 몸을 의탁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서초(西楚)를 쳐 없애고 항왕을 죽여 조국과 망주(亡主)의 원한이나 풀어주신다면 신은 대왕을 섬겨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겠습니다. 신에게는 따로 대군을 이끌고 싸움터를 내달릴 장재(將材)는 없으나, 장막 안에서 천리 밖의 일을 도모하는 주책(籌策)은 있습니다.”

실로 그랬다. 그로부터 죽어 헤어질 때까지, 장량은 장수가 되어 따로 군사를 이끄는 법 없이 언제나 책신(策臣)으로 한왕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장량과 함께 폐구로 돌아온 한왕은 그날로 한(韓)나라 양왕(襄王)의 얼손 한신(韓信)을 불렀다. 전에 장량이 한왕 성을 왕으로 세울 때 장수로 삼은 이로, 그때는 유방의 장수가 되어 있었다.

“장군은 이제 한(韓) 태위(太尉)로서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무관(武關)으로 나아가라. 가서 때를 보다가 항왕이 세운 거짓 왕 정창을 치고 한나라를 되 일으키라. 나도 곧 함곡관을 나가 무도한 패왕과 천하를 두고 자웅을 결하리라!”

한왕은 한(韓) 태위 신(信)에게 그렇게 명을 내려 망국의 한을 씻어달라는 호소에 응함과 아울러 장량을 성신후(成信侯)로 높여 그 울적한 심사를 위로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안돼 또 다시 반가운 소식이 폐구로 날아들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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