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성깔 있는 개’…잡종개가 인간을 물다

  • 입력 2004년 9월 3일 17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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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깔 있는 개/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288쪽 9800원 솔

가난한 한 헝가리 신사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부인을 더 이상 실망시킬 수 없어서 8년 만에 선물을 사기로 한다. 그는 개 사육소를 찾아가는데 “누군가가 잃어버린 털장갑 같은 생물체”가 나타나 바닥을 굴러다닌다. 신사는 “바로 이것”이라며 태어난 지 4주된 풀리 견(犬) ‘추토라’를 사들인다.

‘성깔 있는 개’에 나오는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이 신사 부부가 바로 지은이 마라이와 부인 롤라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마라이는 1948년 공산화된 헝가리를 떠나 미국과 유럽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반세기를 보내는데, 이 소설은 그가 아직 헝가리에서 이름을 빛내던 1932년에 쓴 것이다. 최근 몇 년간 국내에 잇따라 소개된 그의 작품 ‘열정’ ‘유언’ ‘사랑’에서 보여준 비극성 대신 현학적인 유머가 눈길을 끈다. 유려한 문장, 존재론적인 통찰은 그대로다.

추토라는 앙증맞아서 누구나 귀여워해 주지만 신문과 구두를 물어뜯고 양탄자를 망가뜨린다. 특히 책을 잘 물어뜯는데 앵글로색슨 작가들의 책을 즐기며, H G 웰스의 책은 모조리 ‘섭렵’(?)해 버린다.

개는 망나니 같고, 인간은 고상하다. 그러나 개는 최소한 자기감정을 마음껏 발산하지만 인간은 그러질 못한다. 개는 방종하기까지 하지만, 신사는 오히려 거기서 정열을 상실한 자기 자신을 볼 뿐이다. 어느덧 신사는 개와 ‘혼연일체’(?)가 되어 개의 심중까지 읽는다. 이런 식이다. “그래요, 어르신, 제가 한 짓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지 마시고 침을 뱉으세요. 발로 짓밟으세요.”

너그럽게 용서해 주자 추토라의 ‘증세’는 심각해져만 간다. 수의사와 정신분석학자까지 동원됐지만 소용없다. 추토라는 집배원에 이어 집안 일꾼과 부인을 물어뜯고, 급기야 신사와 유혈극까지 벌인다.

이 소설은 “가증스러운 것에서 어떻게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인 듯하다. 마라이는 공산 헝가리의 어용문단이 내민 타협의 손을 끝내 뿌리친 채 1989년 친지라고는 아무도 없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은 20세기가 저물 무렵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느릿느릿 진행되지만 ‘찬란했던 시기’의 마라이가 유연하면서도 심오한 자신의 사유 세계를 한껏 뽐내듯이 써내려 간 작품이다. 그를 통해 세계 문학계에 모습을 드러낸 추토라는 잡종 풀리 견이라기보다는 ‘철학자’처럼 보인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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