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황진이’…황진이 500년 묵은 눈물을 닦아주자

  • 입력 2004년 8월 6일 17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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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의 작가 전경린씨는 “자료를 수집할 때부터 황진이라는 인물만큼 일화 하나하나가 마음에 박혀 들어오면서 작가에게 욕심을 갖게 만드는 주인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사진제공 이룸
‘황진이’의 작가 전경린씨는 “자료를 수집할 때부터 황진이라는 인물만큼 일화 하나하나가 마음에 박혀 들어오면서 작가에게 욕심을 갖게 만드는 주인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사진제공 이룸
◇황진이/전경린 지음/전 2권 각권 274·282쪽 9000원

“여성으로서 황진이를 새롭게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 오늘날 또다시 황진이인가, 그렇게 묻자 돌아온 뜻밖의 대답이었다. 올해 등단 10년째인 작가 전경린씨(42). 그가 소설로 형상화한 ‘황진이’는, 믿거나 말거나, 여성 작가의 숨결이 더해진 첫 ‘황진이’다.

“황진이와 관련된 옛 문헌들을 보면서, 남성의 시각과 서술에 의해 유린당한 부분이 많다고 느꼈어요. 어떤 면에서는 악의적으로 보였죠.”

왜 ‘그들’은 황진이의 유혹을 거부하면 꼿꼿한 남자라고 규정했을까. 유혹이, 사랑이 나쁘다는 규정 자체가 억압적인 것 아닌가….

그래서 줄거리도 바꿨다. 황진이는 지족선사를 유혹하지 않는다. 지족선사가 시쳇말로 ‘자가발전’ 끝에 파멸할 뿐이다. 황진이 따위에겐 넘어가지 않는다고 큰소리쳤다가 발목을 잡혔던 벽계수의 일화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기존 ‘황진이’ 텍스트의 주인공들이 종종 도발적이며 공격적인 선택을 하는 데 비해 전경린의 ‘황진이’에는 도발적인 선택이 없다. 오연(傲然)함을 갖춰 ‘그 앞에서는 모두가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 비굴해지도록’ 하는 점은 다름없으나, 그럼에도 그의 선택은 자신의 전부를 던지는 선택이어서 절절하고 때로는 서럽게 다가온다. 그 서러움의 이유를 작가는 개인적 차원의 일로 몰아가지 않는다. 우리의 헤로인을 슬프게 하는 것은 당대의 현실이 가진 거대한 억압 구조다.

“조선조에 이르러 서얼(庶孼)의 차별이 생기고 성종 대에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여성의 삶은 갇혀버리게 되죠. 권위라는 틀에 사회를 맞추다보면 여성 등 소수자의 행복과 권리는 무시되지 않나요? 본디 모든 ‘원리주의’가 이렇죠.”

그 슬픔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어린 황진이의 삶을 순식간에 나락으로 추락시킨다. 기존의 황진이는 상사병으로 죽은 총각의 상여가 집 앞에 붙들리는 날 자신의 길을 정한다. 반면 전경린의 황진이는 반갓집 규수로 자라나 ‘맹인 기녀의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신분제의 틀에 갇혀버림으로써 ‘명월’로 거듭나게 된다.

새 ‘황진이’의 가장 열렬한 러브 스토리의 상대가 ‘이사종’으로 설정된 사실도 눈길을 끈다. 그는 황진이와 6년간 계약 동거를 했던 인물로, 해석에 따라서는 ‘실없는 남자’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작가는 황진이와 이사종의 첫 만남을 훨씬 젊은 시절로 끌어내린다.

서얼의 차별에 붙잡혀 세상을 비관하는 이사종과 황진이가 절망적 사랑을 나누게 한 뒤, 그 사랑을 추동력으로 자신을 추스른 상태에서 다시 나타나게 만든다. 그러나 이때의 사랑은 ‘계약’일 수밖에 없다. 출세한 조선시대의 남자에게는 정실부인과 가족, 제도와 이념에의 영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랜 진화와 비교할 때 500년 전의 여성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습니다.”

작가는 ‘인간세상에서는 사랑을 이루는 자부심이 가장 큰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작가 자신의 생각이며, 황진이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와 황진이의 닮은 점? 현실을 몸으로 부닥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신뢰를 보내는 것, 기성의 제도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 다른 점? 그만큼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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