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영/죽고 싶지 않다던 그 청년…

  • 입력 2004년 6월 23일 18시 43분


코멘트
온 국민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들의 목숨이 소중하듯 내 목숨도 소중하다”며 “죽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던 김선일씨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비디오테이프로 녹화돼 방송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 제스처 하나하나가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질 것 같지 않다.

도대체 종교와 이념은 뭐고 국제 역학관계는 무엇이기에 고학으로 3개 대학을 졸업하면서 열심히 살아 온 젊은이를 비참한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비통한 생각이 든다. 그 어떤 숭고한 이상과 명분이 이토록 잔인한 살인을 허락할 수 있을까.

시민들은 일종의 집단 충격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테러는 우리와는 무관한 먼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해 왔기에 충격은 더욱 클 것이다. 얼마 전 미국인 니컬러스 버그의 끔찍한 살해 장면을 보았을 때도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터다.

더욱 큰 문제는 이번 사건은 시작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사실 김씨의 비극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할 때 이미 각오해야 했던 일이다. ‘파병=미국의 동맹국=적’이라는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식은 우리라고 비켜갈 리 없다. 테러집단이 연합군에 참여한 30개국 가운데 어느 나라건 민간인을 인질로 붙잡아 철군을 요구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라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제2, 제3의 김선일씨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민간인뿐만이 아니다. 파병 장병들의 안전 문제도 만만치 않다. 김씨를 살해한 납치범들은 한국 군인들에 대한 공격이 뒤따를 것이라고 협박했다. 전투와 테러가 비교적 적은 쿠르드 자치지역으로 간다고 해서 이들이 공격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일본인 3명을 납치했다 풀어준 저항세력은 아마추어 전사였던 반면 이번 김씨 납치범들은 전문 테러리스트들이다.

이번 사건으로 한국은 한발 더 깊숙이 이라크에 발을 담그게 됐다. 파병을 둘러싼 논란이 아직 계속되고 있지만 국제적 관점에서 보면 테러범들에게 굴복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파병 철회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테러에 관한 글로벌스탠더드는 국가가 테러리스트와 협상해서도 안 되고 요구를 들어줘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로서는 선택의 카드가 없어진 셈이다. 따라서 파병 철회 주장은 당분간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의견 중 하나로 존재할 수는 있어도 현실 정치를 다루는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아니다. 물론 이런 주장이 활발히 개진된다는 것은 사회가 건강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민주국가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할 수 있다. 하지만 항상 자신의 주장이 관철돼야만 사회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목적은 달성된다.

선택의 카드가 없는 정부를 계속 밀어붙이다 보면 서로의 감정만 상하고 양측의 핏대 선 목소리만이 남을 뿐이다. 파병 반대를 주장하더라도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오랜 군사독재를 끝내고 민주화를 이룩한 역량을 가진 국민이라면 이 정도는 성숙해야 하는 것 아닐까. 누구나 다수와 소수가 바뀌었을 때도 생각해야 하는 법이다.

김상영 국제부장young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