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03년 시인·사상가 에머슨 출생

  • 입력 2004년 5월 24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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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너 밖에서 구하지 말라!”

‘미국의 스승’ 에머슨. 18세기 합리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분출한 그의 ‘초절주의(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는 미국의 정신을 배양했다.

사회보다는 개인, 이성보다는 직관, 지식보다는 행동을 앞세워 신생국 국민에게 새로운 삶의 윤리를 제시했다. ‘에머슨주의’의 정신적 세례가 뿌려지자, 미국은 비로소 구대륙의 ‘도제시대’에 막을 내리게 된다.

랠프 월도 에머슨. 그는 1803년 6대째 내려오는 뉴잉글랜드의 성직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목사가 되었으나 3년 만에 사직한다.

그는 기적(奇蹟)의 역사적 진실성에 대해 회의했다. 예수에게서 신성(神性)의 외피를 벗겨내자 그는 한낱 위대한 신비주의자에 불과하였다.

에머슨은 자기 스스로의 계시(啓示), 즉 신을 직접적 즉각적으로 경험하기를 원했다. “신과 자신을 격리시켜서는 안 된다.”

1836년 그는 유럽여행에서 돌아와 ‘자연론(Nature)’을 집필했는데, 익명으로 출간된 95쪽의 소책자는 ‘콩코드의 현인(賢人)’이라고 불리는 문필가들을 불러들였다. ‘대지 위에 머리를 치켜들고’ 우주의 영기(靈氣)를 호흡했던 초절주의자들이다.

그러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대로 그들은 함께 행진했으나 발을 맞추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9세기 중엽 ‘미국의 르네상스’에서 에머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자기 안의 신성(神性)을 떠받드는 그의 초절주의는 미국적 경험을 소재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바탕이 되었다. 인간 내면의 죄의식과 고뇌가 사는 ‘비극의 집’을 지었던 포와 호손, 멜빌은 그 미국적 낭만주의의 격류(激流)다.

1860년대에 미국에서 에머슨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반항적 기질은 사그라졌다. 암시와 자극 속에 웅대한 통찰을 담았던 글은 점점 무뎌졌다.

그의 가르침은 더 이상 생의 신랄함을 새기지 못하였다.

1882년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더 이상 ‘해방자’가 아니었으니, 어느덧 그는 자신이 부수고자 했던 바로 그 전통에 속하는 명사가 되어 있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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