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3년 獨 녹색당 연방의회 진출

  • 입력 2004년 3월 5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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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3월.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30대 여성이 화단에 물을 뿌리며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역시 청바지 차림의 젊은이 30여명이 그 뒤를 따랐다.

헬무트 콜 총리는 얼굴을 찌푸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들도 당당한 연방의회 의원이었으니! 독일 녹색당이 현실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다.

생태주의, 여성주의, 비폭력의 기치를 내건 녹색당. “환경은 후손들의 것을 빌려 쓰는 것”이라며 ‘성장의 한계’를 그었던 녹색당의 주축은 ‘68학생운동’ 멤버들이다. 그 핵심에는 ‘녹색운동의 잔다르크’ 페트라 켈리가 있다. 1980년 녹색당 창당의 주역이었고, 3년 뒤 총선에서 연방의회의 교두보를 마련한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녹색의 여신이었다. ‘녹색 영성(靈性)’이 깃들인 평화주의자였다. 인디언들은 그를 ‘샨테 와시데(착한 마음의 여자)’라고 부른다. “그는 쓰러진 나무의 말을 듣고 말을 거는 숲 속의 외로운 영혼입니다.”

켈리의 녹색당은 ‘녹색정치’를 지향했다. 그들은 메마른 독일 정치에 녹색 숲을 일구고자 했다. 부패-폭력-불평등 지수(指數)인 ‘사회학적 산소요구량’(SOD)을 낮추고자 했다. “우리는 좌익도 우익도 아니다. 단지 최전선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녹색당은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변해야 했다. 노선을 완화해야 했다. 유권자들의 의혹을 잠재워야 했다. “녹색당은 ‘토마토’다. 갈수록 붉어진다. 그들은 녹색 외투를 입은 마르크시스트다.”

그러나 그는 협상과 거래를 거부했다. 자주 당 지도부와 충돌했고 그의 이상주의는 ‘다이애나 왕세자비 콤플렉스’라는 조롱을 샀다. 차츰 대중의 관심에서도 멀어진다.

1992년 45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당할 당시 그는 당내에서 완전히 소외됐다. 은둔 생활을 하다시피 했다. 3주가 지나서야 시신이 발견될 정도였다. 그의 오랜 연인이었던 전 나토군사령관 게르트 바스티안만이 그 곁을 지켰다. 그도 숨진 채였다.

독일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그의 묘비는 스산하다.

“내 무덤가에서 가던 길 멈추고 울지 말기를, 나는 이곳에 있지 않으며 잠들어 있지도 않으니….”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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