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빈 서판'…인간본성 타고날까? 길러질까?

  • 입력 2004년 2월 27일 1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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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의 1951년 작 ‘라파엘로식의 머리 폭발’. 저자 스티븐 핑거는 17세기의 철학자 존 로크 이후 오늘날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간 본성에 관한 ‘백지 이론’을 비판한다. 사진제공 ⓒ Salvador Dali, Gala-Salvador Dali Foundation, SACK, 2004

살바도르 달리의 1951년 작 ‘라파엘로식의 머리 폭발’. 저자 스티븐 핑거는 17세기의 철학자 존 로크 이후 오늘날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간 본성에 관한 ‘백지 이론’을 비판한다. 사진제공 ⓒ Salvador Dali, Gala-Salvador Dali Foundation, SACK, 2004

◇빈 서판/스티븐 핑거 지음 김한영 옮김/903쪽 4만원 사이언스북스

자녀 갖기를 망설이는 신혼부부들에게 어른들이 종종 해주시는 말씀이 있다. “제 밥그릇 타고나니 걱정마라.” 하지만 이런 회유책보다는 “자식은 부모하기 나름”이라는 주변의 충고가 더 부담스러운지 우리 사회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자녀의 교육을 위한답시고 ‘기러기’도 마다 않는 부모들이 어르신들의 ‘타고 난다’는 발언에 귀 기울일 리 만무하다. 하지만 부모 맘대로 안 되는 게 자녀 교육 아니던가. 아무리 좋은 환경을 조성해 줘도 아이가 자신의 계획대로 쉽사리 자라주지 않는다는 사실, 이게 바로 부모의 딜레마다.

방과 후 학원 서너 군데는 더 다녀야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의 보통 아이들을 생각해 볼 때, 분명 우리는 본성(nature)보다는 양육(nurture) 쪽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사는 사람들이다. ‘타고난’ ‘선천적’ ‘본능적’과 같은 단어들은 왠지 구시대적 잔재처럼 들린다. 특히 지식인들에게 이런 단어들은 일종의 금기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 대한 믿음이 온갖 불평등(남녀, 인종 등)을 정당화해 주는 근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통념이 과학적으로는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언어학 분야의 석학이요 탁월한 진화심리학자인 저자(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17세기의 철학자 존 로크 이후 오늘날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이른바 ‘백지’ 이론을 본격적으로 비판한다. 그는 인지신경학, 행동유전학, 진화심리학이 밝혀낸 놀라운 반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식인들이 ‘빈 서판’(blank slate·마음은 타고난 특성이 없다), ‘고상한 야만인’(인간은 선하게 태어나지만 사회 속에서 타락한다), ‘기계 속의 유령’(우리 각자는 생물학적 제약 없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영혼을 지니고 있다)이라는 세 가지 독단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고 진단한다.

혹시 ‘빈 서판’이라는 책 제목만 보고 ‘인간이 백지 상태로 태어난다고 믿는 이가 요즘 어디 있다고 난리야’라고 혀를 끌끌 차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몇 쪽만이라도 주의 깊게 읽어보시라. 백지 이론을 ‘실질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이들이 의외로 많으며 어쩌면 자신도 그들 중 한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랄 것이다. 저자는 백지이론이 여전히 ‘공식이론’으로 통한다고 말한다.

사실 철학과 종교, 세계관과 이념 뒤에는 늘 특정한 인간관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서양의 기독교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이야기하고 동양의 맹자는 성선설을 전제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신경과학, 유전학, 진화론과 같은 현대의 과학들도 인간의 본성에 관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저자는 이런 목소리가 과거의 우생학 같은 헛소리와 어떻게 다른지, 또한 좌파의 오해와는 달리 얼마나 급진적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며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일’이 없기를 당부하고 있다.

이 책은 일반 대중서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치밀한 분석과 설득력 있는 논증, 그리고 깊이 있는 학제간 연구로 무장돼 있다. 저자의 이런 솜씨는 퓰리처상을 두 번씩이나 수상한 하버드대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보다 좀 더 세련돼 보인다. 인간 본성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가 인간의 가치를 위협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이 책은 당분간 최종 반론서의 역할을 훌륭히 담당할 것이다.

장대익 KAIST 강사·생물철학 daeik@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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