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유령'…기억더미 속 유령들 더 보듬어야 하리라

  • 입력 2004년 2월 6일 1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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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당원들이 31일 오전 당사앞에서 경선자금 편파수사에 항의, 삭발시위를 벌이고 있다.[연합]
민주당 당원들이 31일 오전 당사앞에서 경선자금 편파수사에 항의, 삭발시위를 벌이고 있다.[연합]
◇유령/한동림 지음/272쪽 8500원 문학동네

“이 세상에 정말 유령이란 게 있을까?”

이 소설집의 표제작 ‘유령’은 이런 의문과 함께 진행된다. 애인 인숙이 주인공 진형을 유혹해 돌발적으로 관계를 갖고 난 뒤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딴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무심코 대꾸한 진형은 갑자기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는 애인을 위로해 주어야만 했다. 기억 속에서 진형은 예전에 보았던 유령을 상기해낸다.

전쟁 통에 뻔히 두 눈 치뜨고 있는 가운데 폭격으로 딸을 잃고 만 진형의 할머니. 나이 들어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칠순 생일날 진형을 쳐다보며 죽은 딸 이름을 부른다. 얼마 뒤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가던 진형은 새벽길을 줄곧 따라온 낯모르는 여인과 충동적으로 몸을 섞는다. 그날 밤 그는 창 안으로 펄럭이며 들이치는 흰 혼백을 본다.

“유령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진형의 얘기를 들은 인숙은 다시금 그의 몸으로 파고들며 말한다. 왜 인숙에게는 유령이 꼭 있어야만 할까. 그것은 평생 고단하게 살다가 이제 암으로 시한부 생을 살고 있는 그의 어머니 때문이다. 유령으로 남을지언정, 가진 것이 지긋지긋하게 아픈 사연뿐일지언정,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에는 너무도 허망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여덟 편 단편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먼 과거의 기억더미에서 헤쳐져 다시 끌려온 ‘유령’들이다. 환상 속에서의 아버지 살해(‘핏빛 바다’), 헤어진 뒤 돌연 세상을 떠난 애인에 대한 기억(‘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새벽 새’), 선배 산악인의 조난사 (‘조난’) 등 의식 저편에 꼭꼭 덮어두었던 기억들은 유령처럼 다시 불려나온다. 사라져 버리기에는 너무도 허망하기에, 그 숨은 사연들은 작은 사건들을 계기로 뛰쳐나와 해원(解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요구하는 것은 승리를 향해 날아오르는 찬란한 해원이 아니다. ‘빛바랜…’에서 여주인공 은주가 뇌까리듯, 그것은 ‘초월된 삶을 위하여 어둠 속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이며 ‘자학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사랑, 새벽을 위한 진실된 영접’이다.

또한 그것은 진형 할머니의 유령처럼 쪽창에서 바람을 받아 너울거리는 거미줄같이 불명확한 것이지만 그래도 기억해 주기를 소리쳐 부르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글쓰기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어둠 속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듯이 불명확하게나마 기억해 줌으로써 한을 풀어 주는 작업, 마치 유령과도 같은 것, 그것이 글쓰기의 한 속성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199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 한동림은 소설가 한승원의 장남. 누이동생 한강과 함께 한 가족 세 명이 소설가인 희귀한 가계(家系)를 이룬다. 작가는 후기에 “이 책을 아버지에게 바치고 싶다. 설혹 이 헌사가 초라하고 볼품없을지도 모르겠으나,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작가의 길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그의 고독한 눈매에 가느다란 웃음이 걸리기를 희망하며…”라고 적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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