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성민자/농사짓는 罪?

  • 입력 2003년 9월 19일 18시 37분


코멘트
성민자
2년 전 작고한 필자의 아버지는 농부였다. 아버지는 매년 초봄부터 가을까지 바쁜 나날을 보내시곤 했다. 비닐하우스에 여문 수박씨를 뿌려 그것을 수확할 수 있을 때까지 온갖 정성을 기울이시는 것이었다. 여린 수박 잎들이 제법 나풀거릴 즈음 밖으로 옮겨 심을 때는 온 식구가 동원되기도 했다. 몇날 며칠 땀 흘린 보람으로 수박 덩굴이 조금씩 뻗기 시작할 때면 새벽부터 어둠이 내릴 때까지 부모님의 손길은 온통 거기에만 머물렀다.

어느 해인가 소중하고 탐스러운 수박 덩이들이 익어갈 즈음, 하늘에서 ‘우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곧이어 장대비가 밤새 내렸고, 낙동강 줄기를 따라 시뻘건 황톳물이 논으로 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정성들여 가꾼 수박이 경계선마저 사라진 논밭에 둥둥 떠다녔다. 아버지는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황톳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자식처럼 귀하게 키운 수박들을 쉴 새 없이 건져내셨다.

그때 건진 1.5t 한 트럭 분량의 수박 값이라고 해봐야 겨우 자식의 한 학기분 공납금에도 미치지 못했다. 다른 논에 심었던 벼 역시 물을 빼주어도 그대로 시들어 주저앉았다.

이렇게 되면서 우리 집은 대출한 영농자금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는 것은 물론 먹고 사는 식량을 마련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이를 지켜보던 필자는 아버지에게 “이게 뭐예요. 억울하지도 않아요”라고 따져 물었다. 아버지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내 천직을 버릴 수는 없지 않니. 뾰족한 수도 없고…”라며 말을 잇지 못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번 추석 연휴 때 태풍 매미의 피해를 본 경남 함안의 시댁과 친정에 갔다가 지붕이 날아간 집과 처참하게 부서진 자동차를 봤다. 전기가 끊긴 시댁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전 재산을 잃은 분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낙동강 줄기를 따라 황톳물에 잠긴 논밭과 가옥들을 보았다.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정부 차원에서 자연재해에 대한 보다 철저한 대비책이 마련됐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성민자 경북 울진군 울진읍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