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신용 불량

  • 입력 2003년 8월 26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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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취재를 갔다가 수단에서 보름 동안 체류한 적이 있다. 국내선 비행기표를 사려고 달러화를 수단 화폐로 바꾸었더니 테니스가방에 가득 찼다. 일일이 셀 수 없어 100장짜리 다발로 돈을 세는데 몇 다발을 골라 검수해 보면 100장에서 대개 한두 장이 모자랐다.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국가와 북한 같은 후진국을 여행하면서 카드가 통하지 않는 불편을 겪다 보면 우리네 경제생활에서 카드가 가져다 준 편의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평양의 옥류관이나 단고기집에 ‘비자’ 또는 ‘마스타’카드 가맹점 표시가 붙어야 비로소 북한에도 시장경제가 본격 도입되는 신호가 아닐까.

▷한국에 신용카드가 처음 도입된 지 25년이 지났지만 1993년까지만 하더라도 전체 카드 사용액이 1조원을 넘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카드이용자가 급격히 늘기 시작해 2002년에는 카드 전체 사용액이 623조원에 이르렀다. 한국은 신용카드사용액 규모로 미국 영국 중국에 이어 세계 4위에 올라서 프랑스와 일본을 앞섰다. 그러나 신용카드 급성장의 이면에는 카드범죄와 신용불량자 양산 같은 부정적 병리현상이 자리한다. 카드 빚에 몰린 신용불량자들이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출구를 찾지 못해 범죄를 저지르거나 자살을 택하는 일이 급증한 것이다.

▷경제활동에서 어느 새 자동차 이상의 필수품이 된 신용카드지만 거기에는 자동차에 없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가속 페달만 있고 브레이크가 없다는 점이다. 수입이 좋은 직장인들도 카드를 긁다 보면 과소비를 하고 결제일마다 후회하는 일을 되풀이한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은 인간의 소비심리를 제대로 짚은 말이다. 신용카드는 은행이 보증하는 외상제도라고 할 수 있다. 절제 없는 소비생활 성향이 있는 사람에게 신용카드는 신용불량자를 만드는 보증수표이다. 평소 생활태도에 신용카드의 브레이크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 절제력, 계획성 있는 소비, 신용에 대한 책임의식이 바로 브레이크에 해당한다.

▷신용불량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경제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은 대학생이라고 한다. 고정수입이 없는 학생들에게 무분별하게 카드를 발급한 회사에 책임이 없지 않지만 경제생활에서 신용의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않은 부모와 사회의 책임도 적지 않다. 소액 신용불량자에 대한 정부의 신용회복 지원조치가 경제활동에 따르는 책임의식을 해이하게 만드는 수준으로까지 확대돼서는 곤란하다. 브레이크 없는 신용카드는 아예 가위로 자르는 편이 낫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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