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아버지의 아들

  • 입력 2003년 8월 4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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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신화 최고의 신(神) 제우스도 처음부터 신들의 신은 아니었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자기도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켜 티탄족의 왕좌를 차지했지만 자식 중 한 명에게 왕위를 뺏길 거라는 예언이 두려웠다. 크로노스가 자식이 태어나는 대로 삼켜버리자 분노한 아내는 막내 제우스 대신 커다란 돌을 아기 옷에 싸서 삼키게 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제우스는 아버지에게 구토제를 먹여 뱃속에 있는 형제들을 토하게 하고 아버지와 싸워 승리한다. 이 신들의 싸움은 아들이 아버지를 이겨내고 새 체계, 새 가치관으로 우뚝 서기 위해선 살부(殺父) 의식 같은 치열한 투쟁을 거쳐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버지는 생산 소유 지배 권위의 상징이면서 심리적으로는 거세와 금지를 상징한다고 펭귄판 상징사전은 풀이한다. 자애롭지만 경쟁적이고, 낳았지만 죽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가 갖는 의미는 이중적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극복’은 아들 스스로 아버지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닮지 않기를 바라면서 닮아가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면서도 능가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는 점에서 아들의 심리 역시 복합적이다. 견훤과 신검, 이성계와 이방원, 흥선 대원군과 고종 등 TV 사극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도 죽거나 죽이거나의 갈등과 애증의 역사다.

▷‘위대한 아버지와 아들의 초상’(폴크마르 브라운베렌스 외 지음)을 옮긴 안인희씨는 “위대한 아버지의 그늘에 가린 아들이 자기 위에 드리운 아버지의 그림자를 뛰어넘기란 어렵다”고 했다. 괴테는 누구보다 인간성을 깊이 탐구했던 대문호이면서도 외아들 아우구스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조수로만 살게 했다.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장남 헤르베르트를 후계자로 만들었지만 아들의 삶은 아버지의 보조적 위치에 머물렀다. 괴테와 비스마르크 모두 83세의 장수를 누린 데 비해 아들들의 명은 훨씬 짧다는 것도 공통적이다. 사회적 성공과 아버지로서의 행복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것일까.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한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은 꼼꼼하고 학구적인 성격 덕택에아버지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자살 동기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지만 유서로 미뤄보아 대북사업 등 선친의 유지를 받들지 못한 자책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의 꿈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을 이루어낸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간다는 일이 쉽고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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