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상하이 올드 데이스'…中 '한국인 영화황제' 일대기

  • 입력 2003년 8월 1일 17시 24분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 영화계에 입문한 김염은 ‘상하이의 영화 황제’로 불리며 영화를 통해 항일 메시지를 전파한 1930년대 중국 최고 인기배우였다. 대표작 ‘대로(1935)’에 출연한 김염(왼쪽). 오른쪽은 ‘대로’ 개봉 3년 전 첫번째 부인인 여배우 왕런메이와 함께 한 김염.사진제공 민음사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 영화계에 입문한 김염은 ‘상하이의 영화 황제’로 불리며 영화를 통해 항일 메시지를 전파한 1930년대 중국 최고 인기배우였다. 대표작 ‘대로(1935)’에 출연한 김염(왼쪽). 오른쪽은 ‘대로’ 개봉 3년 전 첫번째 부인인 여배우 왕런메이와 함께 한 김염.사진제공 민음사

◇상하이 올드 데이스/박규원 지음/425쪽 1만4000원 믿음사

‘1930년대 중국 최고의 남자배우는 한국인이었다.’

김염(金焰·진옌·1910∼1983). 독립운동가 김필순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그는 열일곱의 나이에 대스타의 꿈을 안고 상하이 영화계의 문을 두드렸다. 불꽃이라는 뜻의 예명(焰)처럼 그는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1932년 중국 영화전문지 ‘뎬성(電聲)’의 설문조사에서 김염은 중국의 ‘영화 황제’ 칭호를 얻었다. 2년 뒤에는 ‘가장 좋아하는’ ‘잘생긴’ ‘친구가 되고 싶은’ 배우 등 전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30년대 중국 리얼리즘 영화의 대표작 ‘대로(大路)’를 비롯해 그가 출연한 영화들을 통해 대중은 일본 침략을 배격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진취적인 젊은이의 모습을 보았다. 변화를 원하던 젊은이들은 그의 동작과 말투 하나하나까지 흉내냈다.

1995년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저자는 어머니에게서 ‘내 삼촌이 중국에서 유명한 영화배우였다’는 말을 듣는다. 그와 어머니는 가지고 있던 몇 가지 자료를 방송사 다큐멘터리팀에 보냈다. 방송이 나온다는 통보를 받고 TV 앞에 앉은 그는 프로그램 도입부의 해설을 들으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국 정부가 제작한 영화연감 ‘중화영성’엔 중국 영화계 역대 최고 배우들이 실려 있다…이 책의 맨 앞에 중국 최고 배우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 진옌, 우리말로 김염. 본명 김덕린. 한성에서 태어난 조선인… ‘상하이의 영화 황제’….”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중국과 미국을 넘나들며 작은외할아버지의 자취를 찾는 데 몰두했다. 자료를 뒤지고 고인의 부인 등 관계자를 힘닿는 대로 찾아다닌 8년간의 노력 끝에 한 권 분량의 원고가 모였다. 민음사가 최근 주최한 제1회 논픽션 공모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 글은 400쪽이 넘는 책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리랑’의 작가 님 웨일스는 김염에게서 ‘육체의 아름다움 너머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가슴속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밖으로 표출될 때 그의 모습은 가장 아름다웠다. 30년대 그와 함께 작업한 명감독 쑨유는 “그의 인기의 비밀은 조선인으로서 사회에 가진 불안과 불만을 연기에 투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자신 의 브로마이드를 팔아서 항일자금으로 헌납했다.

중일전쟁과 내전이 끝난 뒤 김염은 장관급 이상의 대우를 받는 ‘일급배우’로 임명됐다. 영화제작소의 책임을 맡기도 했지만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디엔가 소속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영화뿐’이라는 말로 자유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의 만년은 평탄치 않았다. 1962년 위수술을 받다 의사의 실수로 위신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한 뒤 몸을 추스르기에도 힘겨운 나날이 이어졌다. 그에게도 문화대혁명은 일대 시련이었다.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사이 그의 아들은 결국 정신분열증 치료를 받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어떤 시련도 ‘상하이의 영화황제’가 남긴 매력과 저항의 기념비적 이미지에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그의 아버지 김필순이 그랬던 것처럼, 김염 역시 자신의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데 회의를 품지 않았던 진정한 개척자였습니다.” 저자 박규원은 “책을 쓰기 위해 취재를 하는 동안, 인기와 명성을 한 몸에 모은 대스타보다 역사 앞에서 끊임없이 고민한 지식인의 체취를 느꼈다”고 말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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