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임채청/호랑이 등에서 내릴 때다

  • 입력 2003년 5월 27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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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산중에서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나그네가 까닭을 물었다. “시아버지와 남편에 이어 자식마저 호랑이가 잡아먹었습니다.” “그러면 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습니까?” “못된 벼슬아치가 있는 마을보다는 차라리 이곳이 편합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사납다는 뜻의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말의 고사다. 압정이나 폭정, 학정이나 혹정의 우려가 줄어든 오늘날엔 가정(苛政)을 ‘나쁜 정치’로 이해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어지러운 국정으로 국민을 괴롭히는 난정(亂政)이 그 첫머리를 차지할 듯싶다.

대통령까지 못해먹겠다고 탄식하면서 국가기능 마비를 언급했으니 난정의 시대임이 틀림없다. 전국 시도교육감들의 정부정책에 대한 공공연한 불복종선언은 난정의 한 징표다. 실제로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무슨 난(亂)을 접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요즘이다.

검란(檢亂)과 언란(言亂), 외교혼란과 신당소란, 물류대란과 교육대란 등 단 3개월 동안에 터진 난의 이름만 열거해도 난정의 실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일은 또 어떤 난이 기다리고 있을까. 끝없는 난정은 필경 경제파탄과 민생도탄을 부를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국민의 수심을 깊게 한다.

현 정권 출범과정에 관여했던 K씨는 일찍이 대통령취임식 무렵에 “호랑이 등에 탄 노무현 대통령이 위태롭다”며 세 마리 호랑이를 지목했다. 갑자기 찾아든 권세를 주체하지 못해 대통령조차 제어가 힘들어 보이는 일부 측근, 사냥감을 찾아 무리지어 질주하는 일부 급진개혁파, 응분의 보상을 기대하면서 눈을 번뜩이는 일부 지지자 등이었다.

그의 진단은 옳았다. 난정의 중심에 호랑이들이 있었다. 여당대표까지 지낸 이가 대통령 주변의 일부 인사들에 대해 “미숙한 아이에게 칼자루를 쥐어준 격”이라고 비난한 것도 공연히 불안감을 조성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점을 짚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집단행동으로 국정의 발목을 잡은 사람들도 노 대통령 지지자들이 많았다.

코드론이라는 것도 금방 한계가 드러나면서 국정을 더욱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등 돌리는 지지세력에 노 대통령이 “진의를 너무 몰라준다”며 섭섭함을 내비친 것 자체가 코드의 혼선을 의미했다.

노 대통령은 나아가 지지층 이탈에 대한 배신감을 표출하면서 그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려는 내심을, ‘(청와대) 감옥살이’의 답답함을 토로하면서 인(人)의 장막을 걷어내려는 의중을 드러내기도 했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호랑이 등에서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고 했던 K씨의 전망은 틀린 셈이 되나 그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하지만 아직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한총련이나 전교조 문제 등에 대한 정부의 이중성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노 대통령이 진정 호랑이 등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정치생명을 건 일대 결단이 필요하다.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국민의 등에 옮겨 타야 한다. 국정코드도 오직 민의에만 맞추면 된다.

‘위기는 기회’라는 자신의 좌우명대로 지금이 바로 그 기회이지 않은가. 노 대통령이 호랑이 등에 계속 업혀간다면 호환(虎患)의 희생자는 결국 국민일 수밖에 없다.

임채청 논설위원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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