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프리터(Freeter)

  • 입력 2003년 5월 14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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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어 만드는 데 천부적 재질을 지닌 일본인들이 지은 말 중 ‘프리터’라는 게 있다. 영어의 프리(free)와 독일어의 근로자(arbeiter)를 섞어 만든 잡종단어다. 정규직을 갖지 않고 이 일 저 일 하며 되는대로 사는 35세 미만 젊은층을 일컫는다. 산업시대의 역군 부모세대가 피땀 흘려 장만한 집에 눌러 살면서 슬렁슬렁 번 돈으로 사치스러운 취미활동을 즐기는 게 이들의 생활양식이다. 대학까지 나와 아르바이트로 트럭 배달을 하는 게이수케 사우라이라는 청년은 여자친구와 놀고 싶으면 회사에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땡땡이친다. “그게 프리터의 이점”이라는 게 뉴욕 타임스가 전한 그의 말이다.

▷대졸자 4명 중 1명, 줄잡아 200만∼300만명으로 추정되는 프리터는 일본의 오랜 불황이 낳은 프랑켄슈타인이다. 청년실업률이 10.7%나 돼 취업도 힘들지만 회사에 충성해봤자 돌아오는 건 구조조정 명예퇴직 황혼이혼이 고작임을 부모를 통해 이미 목격했다. 굳이 아등바등 살 이유가 없다. 젊은이 5명 중 2명이 월급쟁이가 되는 걸 원치 않으며 5명 중 4명은 자발적으로 직장을 때려치웠다는 일본 후생노동성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미래에 대한 고민도 안 한다. 자식 사랑이 끔찍한 부모 집에 얹혀살다가 나중에 물려받으면 성공으로 여긴다. 이름 하여 기생족(parasite族)이다.

▷세계화의 영향인지 우리나라에도 프리터가 상륙한 것 같다. 채용정보업체 잡링크가 구직자 3156명을 조사한 걸 보면 현재 정규직 취업 대신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젊은층이 31%다. 심각한 취업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55%로 가장 많지만 ‘자유로운 시간 활용을 위해’ ‘획일적인 조직문화가 싫어서’ ‘직장생활 스트레스가 싫어서’도 41%나 됐다. 취직이 안 돼 어쩔 수 없이 프리터가 된 경우가 많으나 본인이 원해서 정규직을 갖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얘기다.

▷당사자들이야 속 편할지 몰라도 성실하게 살아온 기성세대가 보기엔 복장 터질 노릇이다. 특히 고령사회 일본에선 노인 인구는 늘어 나는데 젊은층이 열심히 일해서 노인들 연금을 대주기는커녕 부모 등골이나 빼먹는 형국이다. 제대로 된 직업도 없으니 결혼을 안 하려 들어 인구 문제에도 비상이 걸렸다. 오냐오냐 키워놨더니 어려움을 극복하는 패기가 없어져 게으른 세대가 됐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높다. 문제는 이 같은 일본 사정이 강 건너 불이 아니라는 데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청년실업을 줄이는 특단의 방책이 나오지 않으면 젊은 세대가 영영 일하는 기쁨을 잊고 미래의 희망도 잃은 프리터 천국이 될지 모른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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