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석범/기억의 부활

  • 입력 2003년 4월 11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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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말살당한 데는 역사가 없다. 역사가 없는 데는 인간의 존재가 없다. 다시 말해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주검과도 같은 존재다. 과거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혹독한 지배자들은 사람들의 기억을 뿌리째 뽑아 없애버리고, 죽음에 한없이 가까운 망각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사람들을 기억이 없는 시체와 같이 취급해왔다.

올 4월 3일은 근 반세기 동안 기억을 말살당하고 역사의 암흑 속에 매장당한 제주 4·3사건의 55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오랫동안 기억을 말살당한 ‘4·3’은 한국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 지배자들이 뿌리째 뽑아버린 ‘4·3’의 기억이란 무엇인가. 1948년 동북아시아의 일각에 위치한 한국 제주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미국을 위시한 당시 세계 자유진영이 일본제국과 나치 독일을 타도해 민주주의 승리를 구가하던 바로 그 시대였으니 더욱 참담한 일이었다. 사건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으나 결과적으로 당시 한반도 정세의 집중적인 모순이 드러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근 반세기 군사독재권력이 지배하던 한국 역사에서 4·3은 말살되어왔다. 입 밖에 내놓지 못하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이었다. 과거는 없었던 것으로 소멸시켜야 했다. 때문에 안팎으로 기억을 죽여야 했다. 하나는 막강한 권력에 의한 타살, 다른 하나는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 자신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기억의 자살이었다.

그 사건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한국의 민주화와 더불어 드디어 2000년 1월 김대중 정부 하에서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근거해 특위가 만들어졌고, 산하 조사단이 작성한 진상보고서가 지난달 말 특위를 통과했다. 55주기 당일에는 제주에서 열린 위령제에 고건 총리가 참석했다. 진상보고서 내용에 대한 최종결론은 반년 후에 내기로 했으나 내년 56주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1988년 처음으로 40주기 행사가 열렸으며, 이후 ‘4·3을 생각하는 모임’이 꾸준히 일을 해왔다. 올해는 이달 10일과 11일 도쿄 우에노(닛포리 사니홀)에서 기념강연과 함께 마당극이 열렸다. 제주에서 활동해온 놀이패를 초청한 것이다. 특히 이제까지 4·3 행사를 꺼리고 외면해온 민단과 총련측 인사들이 이번에는 함께 행사에 참가해 참으로 반가웠다.

4·3 문제의 올곧은 해결은 아직 멀었으나 공권력에 의한 재평가와 아울러 진상규명, 명예회복 등의 사업은 더욱 큰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반세기가 지난 이제,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없이 죽음에 접어드는 깊은 망각 속에 얼어붙었던 기억이 지상으로 솟아나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영원히 말살할 수 없었던 기억의 부활이자 기억의 승리이다. 어처구니없는 학살을 영원한 ‘터부’로 은폐하고 놀라운 허위로 역사를 꾸며오며 ‘기억의 암살자’ 노릇을 해온 지난날 위정자들의 책임은 막중하다.

4·3의 부활은 우리 역사의 부활이다. 제주만이 아니라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문제이기에 이 사건의 해결은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재정립하는 데 큰 계기가 될 것이다.

자주 다니지 못하는 고향 땅이지만 제주도에 가면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밑, 서귀포 정방폭포 밑 깊은 물 속, 여기저기에 아직도 떠도는 원혼(寃魂)의 환청(幻聽)에 마음이 괴로웠다. 하지만 ‘까마귀의 죽음’ 이래 ‘화산도’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동안 4·3을 문학적 테마로 다뤄온 나는 지금, 망각이 기억으로 재생하는 아주 극적인 시대의 흐름을 눈부시게 바라본다. 언젠가 실현되고야 말 해원(解寃) 굿, 원혼들의 지상으로의 부활은 기억의 부활이기도 하다.

▼약력 ▼

1925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제주 출신 부모 아래서 출생. 대표적 1세대 재일교포 작가. 집필 20년 만에 1997년 완간한 대하소설 ‘화산도(火山島)’로 1998년 마이니치예술상 수상.

김석범 재일교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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