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선수 발목 잡는 코치'

  • 입력 2003년 4월 6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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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 양반은 흔히 먼 길을 갈 때 돈을 몸에 지니지 않고 하인이 갖고 가게 했다.

이를 두고 실학자 박지원은 “양반은 재물을 멀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면 서양인 매캔리는 “양반은 현명해서 강도에게 돈을 뺏기지 않으려고 하인에게 맡긴 것”이라고 해석했다. 보는 눈에 따라 세상 일이 달리 비치는 한 사례다.

경제 5단체는 최근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에 버금가는 어려운 침체 국면에 처해 있다”면서 “정부가 경제불안 심리를 해소하는 데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고 촉구했다. 5단체가 발표한 문건 제목도 ‘경제난국 극복을 위한 경제계 의견’이어서 사뭇 긴장감이 감돈다.

이에 대해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은 “경제 단체장들이 대(對)국민 성명서를 발표하는 방식으로 개별 정책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재계를 비판했다. 또 조윤제 대통령경제보좌관도 “위기상황은 아니며 재계는 원래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면서 “호떡 집에 불난 것처럼 정부가 너무 조급하게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재계와 정부 관계자의 시각 차이가 이렇듯 뚜렷하다. 지금 경제 실상은 어떤가. 상당수 기업들은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물론 액면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업종에 따라, 개별 기업에 따라 사정은 다르고 잘 돌아가는 기업도 많다.

그렇다 해서 정부 당국자처럼 재계 목소리를 엄살로 치부할 만큼 한가한 때는 아니다. 기업인들은 경제가 어려울 때면 살얼음판을 딛는 심경이다. 거래처에 줄 물품 대금, 종업원 임금, 정부와 금융기관에 내야 하는 세금과 이자…. 이를 어떻게 마련하나.

‘회사는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고 하지만 이는 극소수 부도덕한 기업인의 경우이고 대다수 기업인은 회사가 쓰러지면 자신도 패가망신한다. 그들은 전 인생과 재산을 걸고 기업을 끌어나간다. 이들이 어렵다고 하면 일단은 믿어줘야 하고 속사정을 살펴야 한다.

2일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도 경제가 어려운 원인이 주로 해외 요인과 기업 잘못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기업투명성을 높이는 개혁을 이루면 경제가 살아난다는 논리다.

대통령 연설과 정부관계자들의 발언 곳곳에서 정부의 개혁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럴듯한 수사(修辭)의 껍질을 벗기면 참여정부의 경제개혁은 시장주의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듯하다. 민간에 대한 지나친 개입 등 시장경제질서에 어긋나는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정부는 무오류(無誤謬)이고 기업은 질서 문란 사범으로 여론몰이를 하는 것도 시장주의라 보기 어렵다.

부패하거나 도그마에 빠진 공권력이 어설픈 개혁의 ‘칼춤’을 추면 경제가 정말로 위기에 빠질 수 있다. 공권력 사회는 얼마나 투명한가.

노 대통령의 측근이 생수회사 투자용으로 거액을 받았다는 것과 국세청 간부 집에서 현찰 뭉치와 양주 200여병이 발견됐다는 사실로 미루어 대다수 민간인들은 개혁대상 우선 순위가 정치권과 관료라고 믿을 것이다. 우리는 관존민비(官尊民卑),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역사를 알고 있지 않은가.

지금 경제 상황은 심상찮다. 개혁의 우선 순위와 구체적인 실행 방법에 대해 냉철하게 점검해야 할 때다. 이벤트성 개혁이나 개혁 원리주의에 사로잡히면 몇 년 후 한국 경제는 기업인들이 떠난 텅빈 공간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코치들이여, 선수들이 열심히 뛰도록 제발 가만히 있으라. 서툰 코치가 가르친다는 게 선수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고승철 경제부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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