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인도적 개입'…'인도적'명분뒤에 숨겨진 폭력성

  • 입력 2003년 4월 4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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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적 개입/모가미 도시키(最上敏樹) 지음/조진구 옮김/207쪽/1만원/소화

역사상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영토적 허기’를 때우기 위해서나 야만적 광기를 주체하지 못해서 전쟁에 뛰어든 지도자는 출현한 적이 없다. 소설가들은 전쟁의 주범을 권력욕의 화신이나 편집증적 망상가로 그리기도 하지만, 국제정치의 현실과 학문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국가의 지도자들은 언제나 자칭 국제사회의 정의 구현자이거나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자다. 전쟁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구실이라고 비난하고, 냉소적인 사람들은 위선이라고 폄하하며, 다소 진지한 사람들은 명분이라고 분석한다.

지난 세기 전반의 두 차례 세계대전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쟁’이었고 ‘파시즘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구출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냉전시대에도 초강대국에는 보복을 두려워해야 할 강력한 적이 있었고 우려해야 할 가공할 무기가 있어서 상호간의 ‘무력’ 개입은 극력 회피했지만, 약소국의 ‘인민을 해방’하거나 ‘민주정권을 수호’하기 위한 ‘인도적’ 개입은 자제되지 않았다.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이라크의 바스라에서 피란가는 한 어린이. 저자는 ’인도적 개입’의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면서 이를 명분으로 이용하는 국제적 폭력의 기만성을 비판한다.동아일보 자료사진

하나의 초강대국만이 우뚝 선 탈냉전의 세계에서 자제하기 어려운 권력의 생리를 포장해 주는 ‘구실’이나 ‘명분’은 지난 세기와 마찬가지로 고상한 철학과 이념의 향기를 지니고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군의 신유고 공습과 함께 회자되기 시작한 ‘인도주의적 개입’만큼 인류애적 보편성과 국제법적 정당성은 물론 법철학적 깊이까지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야말로 국가지도자들의 입맛에 딱 맞는 용어는 없을 것이다.

‘인도주의적 개입’에 대한 이 같은 선입견은 인도적 개입의 명석한 정의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개입사례의 공과를 따진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격파당한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특정 국가의 독단에 의한 자의적 개입보다는 넓은 의미의 인도적 개입, 즉 유엔의 승인을 받은 개입이 그나마 윤리적인 색채를 더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시에 NATO의 코소보 공습을 반면교사로 삼아 공정한 개입과 지속적인 결과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인도적 개입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고찰함에 있어 개입주체의 정당성과 행사된 개입내용의 타당성에 대해 국제법학자 특유의 법리가 동원된다. 하지만 후반부에 들어서 법의 논리는 법철학적 연원탐구로 바뀌고 종국에는 국제평화를 위한 화해와 인류애, 자기희생과 같은 사상적 단초를 제공하며 끝을 맺는다.

증오가 폭력을 부르고 그 폭력이 비인도적 참화와 인도주의를 가장한 무력개입을 부르며 그것이 다시 보복을 부르는 악순환의 고리, 즉 인도적 개입의 가장 어려운 문제점을 저자는 과연 어느 지점에서 명쾌하게 끊어낼 것인가? 이런 궁금증을 가진 독자에게 ‘익명적 희생을 각오하라’든지 ‘화해하도록 지원하라’는 식의 추상적 해법은 다소 당혹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흉포한 권력들이 충돌하는 국제사회에서, 개입을 초래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과 이타적 희생정신에 호소하는 이외에 어떤 대안이 있겠는가.

이 책은 2001년의 9·11테러 전에 쓰였다. 하지만 여기서 제시되는 인도주의적 개입의 법률적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아직도 꼬리를 길게 끌고 있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전쟁과 현재 진행 중인 이라크전쟁의 국제법적 도덕적 일탈 정도를 측정해 보는 것도 훌륭한 지적 훈련이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내의 재군비론자들과 헌법수호자들 모두 “희생의 각오를 가진 박애 구호활동에 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지적은 이라크전쟁 파병의 적극적 찬반론자들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다.

저자가 주장하는 ‘익명적인 희생의 각오’는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상통한다. 그리고 인도주의의 승리에 장애물이 되는 것은 국가이익과 민족주의, 얄팍한 애국심이다. 즉 인도주의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국민의 필요가 아니라 인류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우선적으로 성찰하는 코즈모폴리턴적 교육이나 ‘세계적인 행동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논리적 사상적 흠결은 없다. 하지만 저자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보편적 이성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특권은 철학자의 전유물이 될 수 있으며, 평범한 인간들은 여전히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웅현 고려대 평화연구소 연구교수·국제정치학

zvezda@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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