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하벨의 퇴임

  • 입력 2003년 2월 4일 20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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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실망시킨 국민, 저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았던 국민, 그리고 저를 미워했던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용서하십시오.”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66)이 지난 일요일 감동적인 연설을 남기고 퇴임했다. 무려 13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나 그의 퇴임행사는 TV를 통해 방영된 불과 5분짜리 대국민 연설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전 세계 언론은 큰 관심을 보였고 체코 국민은 진심으로 그의 퇴임을 아쉬워했다. 체코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및 유럽연합(EU) 가입 등의 공적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의 분열 등 실패까지 인정하며 용서를 비는 겸허한 자세로 떠나는 하벨의 모습은 민주화 혁명을 주도해 공산정권을 무너뜨린 활약에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

▷하벨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85)과 닮은꼴이다. 똑같이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한 투쟁에 청춘을 바쳤고 학대받던 반체제지도자에서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우뚝 선 인생의 궤적도 닮았다. 그래서 하벨은 ‘동유럽의 만델라’로 불린다. 두 사람이 비록 피부색깔은 다르지만 인류가 존경해야 할 같은 높이의 지도자라는 공감대가 이심전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의 자리를 떠나는 두 사람의 모습도 닮았다.

▷만델라도 국민의 아쉬움속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백인정부의 흑백인종차별정책에 대항해 싸우다 무려 27년을 감옥에서 보낸 만델라는 ‘불과’ 5년간 권력을 누린 뒤 훌쩍 권좌에서 떠났다. ‘금세기 최고의 정치지도자’ ‘용서와 화해로 인종차별의 벽을 넘어선 영웅’ 등의 칭호가 말해주듯 얼마든지 재집권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멀고 험한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며 정치후배인 타보 음베키에게 길을 터주고 물러난 만델라. 퇴임 후 국제분쟁 해결, 에이즈 퇴치 등을 위해 힘을 쏟고 있는 그를 세계인은 ‘퇴임 후가 더 아름다운 지도자’라고 부르며 잊지 않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도 흔히 만델라에 비견된다. 노벨평화상 수상 경력까지 따진다면 그런 타이틀이 없는 하벨보다 훨씬 더 만델라에 가깝다고 할 만하다. 김 대통령 스스로 2년 전 만델라를 초청해 ‘20세기의 위대한 양심’이라고 칭송하며 동지적 유대감을 갖고 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 대통령의 퇴임 모습은 ‘만델라급’이 될 것인가. 한국민도 남아공이나 체코 국민처럼 아쉬움 속에 퇴임 대통령을 보낼 것인가. 현재로서는 아름다운 퇴장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김 대통령을 ‘아시아의 만델라’라고 한 것은 지나친 평가였는가.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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