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눈물 안흘리게 하는 정부'

  • 입력 2003년 1월 19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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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야근을 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택시운전사가 “손님이 너무 없다”며 울상을 지었다.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들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말 그 정도냐”고 했더니 “그때는 퇴직금이라도 굴러다녔지만 요즘은 지갑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며 걱정했다.

그가 전한 현장경기(景氣)가 아니라도 지금 우리 경제는 어렵다. 소비심리는 얼어붙어 ‘빙하기(氷河期)’에 들어갔다.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증시에서 돈이 빠져나간다. 기업 투자심리는 살아나지 않는다. 국제유가와 원화가치가 함께 뛰면서 수출도 안심하기 어렵다.

이런 경제불안은 복합적 요인에 기인한다. 북한 핵문제와 이라크사태 악화, 불투명한 국내외 경제전망을 들 수 있다. 차기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의구심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동안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멤버들로부터 쏟아져 나온 정책구상은 대기업과 ‘가진 자’를 적대시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기업 투명성이 더 높아져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시장에서 신뢰를 얻기 위해서도 회계제도와 경영결정의 투명성 제고는 필수적이다. 이에 뒤떨어진 기업은 우선 투자자와 소비자가 외면하는 시대다.

그러나 궁금하다. 갑자기 경제분야 최대 화두(話頭)가 될 만큼 한국의 대기업과 기업인이 다른 분야보다 ‘나쁜 집단’이고 경쟁력이 떨어지는가. 정부가 이들을 수술하겠다고 나선 것이 경제의 종합경쟁력을 ‘업그레이드’시킨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새 정부가 해야 할 첫 ‘숙제’는 정부정책의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을 높이고 관치(官治)경제를 타파하는 것이다. 정치 및 행정권력이 기업활동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전규제는 과감히 풀어야 한다. 대신 위법행위에는 공정하고 단호하게 대처하면 된다.

산업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0월 68개국의 국가경쟁력을 평가한 결과 한국 정치가와 행정관료의 불투명성은 31위인 반면 기업가의 경쟁력은 15위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국가경쟁력을 높이려면 무엇보다 정책 불투명성을 줄여야 한다는 보고서를 작년 5월 내놓았다.

이런 점은 또 어떨까. 정책결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오리무중인 산업은행의 현대상선 대출. 정부가 기업의 팔을 비틀어 밀어붙였다가 대실패로 끝난 빅딜. 재정에 미칠 영향조차 검토하지 않았다가 참담한 결과를 빚은 의약분업. 정책의 당위성은 있지만 정권 실세(實勢)와 대통령 친인척이 끼어들어 곳곳에서 낭비된 공적자금. 이런 ‘정책 실패’의 불투명성 및 밀실처리의 전모를 밝히고 재발방지대책을 내놓는 것과 대기업에 대한 ‘칼질’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급한가.

착각하지 말자. 부(富)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주역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과 혁신적 개인이다. 민간분야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간섭이 심한 나라일수록 혹독한 대가를 지불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미국 정치학자 토머스 셸링은 “인간의 생산성과 관련해 개탄할 만한 사실은 창조보다 파괴가 훨씬 더 쉽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목장주인이 우유를 가장 잘 만들어내는 젖소가 마음에 좀 안 든다고 매질만 가할 때 그 목장의 미래를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어느 나라든 경제의 성장엔진이 멈추고 지나친 평등논리가 지배할 때 가장 힘들어진 계층은 부자가 아니라 서민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이 결과적으로 그들을 더 고통스럽게 한 사례도 많았다. 기업이 주눅들어 투자와 고용을 줄일 때 누가 우선 피해를 보겠는가. 경제는 감상적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부’는 좋다. 그러나 먼저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는 정부’가 필요하다. 지금 한국경제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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