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내셔널 어젠다위원회 제안]④ 통상정책

  • 입력 2002년 12월 29일 18시 20분


대통령은 ‘통상의 CEO’여야 한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의 70% 이상이 수출과 수입에 기초하고 있는 통상 국가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처럼 대통령은 통상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국민이 잘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대통령의 책무라면, 통상은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정책 대상인 셈이다. 그러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중요성에 걸맞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통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통상교섭본부를 만들었고 이를 외교통상부 장관 밑에 두었지만 이런 체제가 통상교섭에서 반드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솔직히 지난 5년간 수행된 통상협상 중에서 ‘성공작’이라고 꼽을 수 있는 것을 찾기는 어렵다. 미국과의 투자보장협정 협상은 스크린쿼터 등의 문제로 좌초했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은 한국의 세계 10대 교역 규모(EU를 하나로 산정)를 의심할 정도로 오명을 남겼다.

통상 협상이 성공하려면 △상대국과의 대외적인 협상과 △정부 부처간 입장 대립의 대내적 조정이라는 두 측면이 모두 성공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현 정부의 ‘대내적 조정’은 낙제점이었다.

예컨대 영화인들의 압력을 받은 문화관광부나, 농민들의 압력을 받은 농림부는 통상교섭본부나 다른 부처와 충돌하게 마련이다. 시장 개방으로 특정 산업이 이익을 얻으면 다른 산업이 피해를 보게 되고, 문화나 농업 등 관련 부처가 나름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므로 이러한 충돌 그 자체는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문제는 대외경제장관회의 등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데도 부처간 갈등이 전혀 해소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장관들이 이견을 좁힐 수 없다면 대통령이 단호하게 최종 결단을 내렸어야 한다. 일부 문제가 있음에도 전체로서 필요할 때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 CEO다. 그러나 지난 5년간 ‘통상리더십’은 실종됐다.


94년 미국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은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의 거센 반대에 직면했다. 여당인 민주당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NAFTA 체결에 리더십을 발휘했다. 여러 경로로 NAFTA의 문제를 공론화하여 사회적 합의를 도출했다. ‘NAFTA 때문에 재선에 실패할 것’이라는 말까지 있었지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재선됐다.

현 정부에서 통상협상은 통상교섭본부의 책임이고, 통상교섭본부는 외교부 장관의 관할에 속한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 통상외교는 우선 순위에서 정무외교에 밀릴 수밖에 없다. 미국도 60년대까지 통상협상을 국무부에서 담당했다. 그러나 안보와 외교 문제에 밀려 통상업무가 제대로 되지 못하자 40년 전 케네디 전 대통령은 지금의 무역대표부(USTR)를 독립 설치했다.

통상은 대외관계라는 면에서 외교의 성격을 가지지만 그 본질은 경제다. 통상협상은 단순한 ‘외교’가 아니라 ‘싸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무외교와 분리해 접근해야 한다. 또한 통상협상의 책임자는 장관급이어야 하며 국무회의에서 다른 부처 장관들과 대등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

통상협상의 책임자는 장기 근무가 보장돼야 한다. 미 무역대표부 대표의 평균 재임기간은 4년에 가깝다. 통상의 본질이 경제이기 때문에 산업자원부 등 경제의 실무 부처도 통상 전문가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인력과 조직이 보강돼야 한다. 특히 통상의 주요 부분을 담당하는 산자부로부터 통상기능을 사실상 제거한 현 체제는 잘못이다.

제목
외교통상형(외교와 통상 결합형)산업통상형(외교와 통상 분리형)독립 조직형
장점△전체 외교 차원에서 통상 외교를 폄△통상외교에서 이익집단이 없는 외교부가 전체적인 국익 고려 △축적된 외교 교섭 기술 활용 가능 △특정 산업에 대한 지식을 통상에서 적극 활용 가능△산업별 이해를 통상에서 충분히 반영△전반적인 통상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특정분야에 대한 공세적인 통상외교 전개 가능
단점△개별 산업에 대한 전문성 부족△다른 경제 부처와의 협조 조화 필요 △이익집단의 영향으로 균형된 시각에서의 통상 외교 곤란 가능성△협상 기술 부족 우려△개별 부처 이익 중시 우려△전반적인 통상관계 고려하지 않아 통상 관계 악화 우려△개별산업에 대한 이해부족 우려
국가한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벨기에 영국 프랑스미국
자료:외교통상부

시장을 개방하면 필연적으로 피해를 보는 산업군(群)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적절한 산업 피해구제와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이 업무는 산자부 산하 무역위원회가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개방에 따른 피해의 구제는 공업뿐 아니라 농업과 서비스업에 이르는 경제 전반이 그 대상이다. 이 점에서 무역위원회는 현 체제의 산자부에서 독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통상 관련 조직을 개편 보강하는 것은 ‘작은 정부’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지만 ‘작은 정부’가 시대적으로 중요한 정부 역할을 외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정부의 통상 조직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보다 강화되고 전문화돼야 한다.



박노형

고려대 법대 교수·국제법



▼서강대 안세영교수 “시장개방, 산업 구조조정과 연계해야”▼

“마늘 협상 이후 마늘 농가에 주는 보조금은 구조조정할 시간을 주는 것이어야죠. 마늘 농사를 계속 짓게 하는 것이어서야 되겠습니까.”

서강대 국제대학원 안세영(安世英·사진) 교수는 “통상 정책은 국내 산업의 구조조정 정책과 연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의 쌀 협상과 그 이후의 쌀 정책은 통상 정책과 산업 정책이 따로 노는 대표적인 사례. 1993년 협상에서 한국은 예외를 인정받아 쌀 개방을 10년 늦췄다. 쌀은 세계무역기구(WTO) 뉴라운드 농업 협상 일정과는 별도로 2004년에 재협상을 벌이게 돼 있다.

그러나 재협상에서 한국이 목소리를 낼 여지는 거의 없다. 당시 쌀 개방을 늦추는 조건으로 한국은 효과적인 생산제한조치(감산)를 적용하기로 했었다.

“구조조정할 시간으로 10년을 번 것이었는데 그 이후 정부 쌀 정책은 거꾸로 갔어요.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쌀 수매가를 4∼5%씩 4차례나 올렸거든요. 농민들이 쌀 농사를 다른 것으로 전환할 이유가 없는 거죠. 감산은커녕 올해 쌀 재고량은 사상 최고예요.”

반면 일본 정부는 94년부터 2001년까지 정부의 쌀 수매가를 10.3% 내렸고, 예정보다 1년8개월 이른 99년 4월 쌀 시장을 개방했다.

안 교수는 “정부가 미리부터 농업 구조조정 문제를 공론화시켰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는 정치적인 리스크가 큰, 골치 아픈 문제를 차기 정권으로 미룬 셈이라는 것.

“협상은 김영삼(金泳三) 정부 때 이뤄진 것이고, 개방은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뒤 이뤄지게 돼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개방에 따르는 파장은 5년 후, 10년 후에 닥치는 것입니다. 10년 후를 대비하는 것은 현재의 당면 과제죠.”

시장개방과 관련한 법과 제도를 미리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유무역협정(FTA) 구조조정 특별법 등이 그 사례. 안 교수는 “칠레와의 FTA 협상이 3년 전에 시작됐는데도 아직 FTA 구조조정 특별법의 구체적인 내용이 입안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앞으로 뉴라운드 협상에서 논의될 교육 의료 법률 등의 분야도 산업의 측면에서 개방의 파장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통상외교 실패 사례▼

올해 10월 가서명해 협상 시작 3년여 만에 일단락된 한국과 칠레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협상은 한국 통상외교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한꺼번에 드러냈다.

협상 초기에는 칠레산 사과와 배의 개방에 대한 농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고, 협정 체결로 인한 피해 보상책 마련도 소홀히 해 난항을 겪었다. 협상 막바지에는 사과와 배를 양보한 칠레측이 ‘금융시장 개방 불가’를 들고 나오자 외교통상부와 재정경제부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 협상력을 떨어뜨렸다. 사과, 배 등의 문제로 협상이 1년 이상 제자리를 맴돈 것도 정부의 고질적인 ‘통상 리더십’ 부족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통상외교에서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사례들은 적지 않다.

1999년 초 일본에 재협상을 ‘요청’해 마무리된 한일 ‘쌍끌이’ 협상은 정부가 ‘쌍끌이 조업’이 있는 지도 몰라 빚어진 것. 또 ‘쌍끌이 조업권’을 일본으로부터 뒤늦게 얻어내긴 했으나 반대 급부로 일본에 준 백조기와 복어어선 조업권이 오히려 큰 것으로 밝혀졌다.

러시아와의 남쿠릴수역 꽁치조업 협상 실패는 상대국 내부 사정에 무지한 경우. 정부는 지난해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았던 쿼터만을 믿고 14만t가량의 쿼터 확보를 자신했다. 하지만 우선권을 가진 러시아 어민들이 입찰을 통해 민간 쿼터를 모두 가져갔다. 지난해에는 러시아 어민들이 처음 도입된 ‘쿼터 입찰제’를 거부해 한국 어민 몫이 있었으나 올해에는 러시아 어민들이 대거 참여한 것을 몰랐다. 모스크바에서 쿼터 입찰이 있기 하루 전 한국 정부는 러시아의 관련 고위 공무원에게 “작년과 같은 쿼터를 약속했다”며 훈장을 주기도 했다.

서울시립대 세무대학원 임주영(林周瑩) 교수는 “70년대 미국과 담배소비세 협상을 하면서 미국 요구에 따라 담뱃값에 비례하지 않고 개비당 얼마씩의 ‘종량세’를 채택한 것은 협상실패의 고전적인 예라고 말했다. 종량세에 따라 한국에선 상대적으로 비싼 미국 담배가 한국 담배보다 세금이 적다. 미국에서는 값에 따라 세금을 부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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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룡기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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