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TV토론

  • 입력 2002년 11월 25일 18시 21분


적극적 공격 대 ‘맏형’의 여유로움. 22일 열렸던 정몽준-노무현의 TV토론 이미지는 이렇게 요약된다. 결론적으로 노무현의 여유가 정몽준의 공세를 눅였지만, 방영 직후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었다. TV토론이 끝나자마자 누가 더 잘했느냐를 놓고 실시된 여론조사들에서는 한결같이 정몽준이 잘했다는 응답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조사결과는 달라졌다. 23일 본보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이 잘했다는 응답이 32.0%로 정몽준의 30.2%보다 앞섰다. 더불어 노무현의 지지도도 높아져 단일후보로 우뚝 서게 됐다.

▷왜 시간이 흐르면서 반응이 달라졌을까. TV토론에서 정몽준은 평소의 동문서답형 태도와 달리 다양한 정책 분야의 해박한 지식을 유창한 말솜씨로 드러냈다. 시청자들의 즉각적 반응은 “정몽준이 (예상보다) 잘하네”였고 전문가들의 의견도 정몽준-공세, 노무현-수세로 모아졌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하루가 지나고 곰곰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한국인이 호감을 갖는 인간형은 말 잘하고 따지기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말은 어눌하되 겸양과 양보의 덕목을 갖춘 사람이 더 진실하다고 평가받는다. 정몽준이 MBC TV ‘100분 토론’에 처음 등장해 특유의 ‘허무 개그’를 보여줬을 때 “말만 잘하는 정치인들보다 백번 낫다”는 뜻밖의 호평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물론 TV토론이 이번 여론조사에서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조사결과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1960년 미국에서 정치의 달인 닉슨이 신출내기 케네디에게 진 것이 TV토론 탓이라는 건 유명한 얘기다. 미디어학자 백선기 교수(성균관대)는 “서구에선 TV토론 잘한 후보가 선거에서도 이기는 경향이 있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며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달변의 정원식 후보가 눌변의 조순 후보에게 진 사례를 든다. 과묵과 신중 성실성을 같은 묶음으로 높이 평가하고, 말과 토론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 문화적 특성이 큰 몫을 한다는 풀이다.

▷TV정치시대, 시청자를 사로잡는 것은 이미지라고 한다. 그런데 유권자가 원하는 정치인의 이미지도 시대와 필요에 따라 변한다. 2000년 미국 대선 TV토론에서 식견 풍부한 앨 고어의 지나치게 공격적인 이미지가 조지 W 부시의 촌스러워서 되레 신뢰성 있어 보인 이미지에 패한 것이 그 예다. 게다가 우리나라엔 이미지 정치의 미몽을 뛰어넘는 여러 측면의 ‘현실 정치’가 존재한다. 보이는 이미지와 들리는 말에만 좌우되지 않을 만큼 우리 국민이 성숙하다는 의미라면 좋겠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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