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자]류춘수 이공건축 회장

  • 입력 2002년 10월 8일 17시 44분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한국 대표팀은 이곳에서 아쉽게 4강 신화를 마쳤지만, ‘대∼한민국’의 함성은 세계를 흔들었다. 팽팽한 흰 천막(인조섬유 막)이 지붕처럼 뒤덮은 아름다운 경기장도 세계인의 가슴에 한국의 미를 아로새겼다. 방패연과 황포돛배를 연상시키는 상암 월드컵경기장을 설계한 사람이 류춘수(56) 이공건축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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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류 회장이 월드컵 경기장 공모에 도전했을 때 주위에서는 그를 무모하다고 여겼다. H, P사 등 국내의 내로라 하는 건설 회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사실상 당선을 예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류 회장은 골리앗에게 도전했다.

프랑스 월드컵 경기장을 살펴보기 위해 탔던 비행기에서 잡지에 실린 방패연 사진을 보고 상암 경기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마침내 그는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이 됐다.

류 회장은 한국의 미를 살린 독특한 건축으로 유명하다. 류 회장 스스로도 “어렸을 때부터 ‘고정관념은 나의 적’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학생시절에는 수학 문제를 교과서에 없는 다른 방법으로 푸는 것을 즐겼고, 그런 정신이 건축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이 그냥 나왔을 리 없다. 그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번뜩이는 영감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각의 축적”이라고 강조했다.

멋진 건축물을 한번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그림을 그리다 보면 처음과는 전혀 다른 생각이 돌연변이처럼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 필요한 것이 고통스런 인내였다.

“벌레가 고치를 만들어 침잠의 세월을 보내면 나비가 됩니다. 많은 이들이 벌레에서 바로 나비가 되고 싶어해요. 이것이 바로 표절입니다. 고통을 겪어야만, 계속 실패해야만 마지막에 창조품이 태어납니다.”

류 회장은 표절이 판치고 편한 길만 찾으려는 요즘 세태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기자에게 ‘고락(苦樂)’이라는 한자를 직접 써 주고는 “고통이 곧 즐거움이며, 고통 없는 즐거움이 바로 마약”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소년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것도 과학의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려는 것이며, 결국 과학의 즐거움을 모르게 된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건축에서 과학이나 예술이 아니라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설계한 서울 강남 리츠칼튼 호텔은 아늑한 진입로로 유명하다.

류 회장은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이 길에서 시골 신작로길의 정서를 느끼길 바랬다. 월드컵 경기장도 아름다움에 앞서 관객과 선수들이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을 먼저 고려했다고 한다.

그의 건축에서 잘 나타나는 한국의 미는 류 회장이 벗삼아온 자연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대학 시절 그는 전국을 돌며 깊은 산 속의 사찰을 그렸다. 한국의 미를 찾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나와 고 김수근의 건축사무소로 옮겨 새로 일을 배우기도 했다. 이때 수입이 3분의 1로 줄었지만 비로소 건축에 대해 눈을 뜰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류 회장은 “유학 안 간 것이 다행”이라며 “덕분에 한국 산천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주말마다 ‘별이 쏟아지고 계곡물이 울어대는’ 그의 고향 경북 봉화의 산골로 떠나 자연에 파묻힌다.

“건축가가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정년이 없죠. 곳곳에 공부할 거리가 쌓여 있어요.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건축가는 멋진 건축물을 남깁니다. 어찌 건축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김상연 동아사이언스기자 dream@donga.com

▼류춘수 회장은▼

류춘수 회장은 어렸을 때 수학, 물리, 기하, 지구과학을 좋아했다. 천문학이 취미였고, 미술에도 탁월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당구를 하거나 사복 입고 영화 보러 가는 것을 즐길 정도로 모범생은 아니었다. 1970년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했으며, 그해 불교미술공모전 건축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고 김수근 건축가 밑에서 일하다 1986년 자신의 설계사무소인 ‘이공건축’을 세웠다. 서울올림픽 체조경기장을 국내 최초로 막 건축물로 세웠으며, 부산사직야구장, 말레이시아 사라와크 주경기장 등을 설계해 스포츠 경기장 설계에서 국내 1인자로 평가받고 있다. 또 가장 한국적인 건축가로 손꼽힌다. 강남 리츠 칼튼 호텔을 설계해 95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으며, 2000년에는 영국 왕실에서 ‘듀크 에딘버그 펠로우십 상’을 받았다. ‘동서양의 수경 비교’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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