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파장에서 본전찾기

  • 입력 2002년 9월 27일 18시 24분


요즘 집권층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시골 장터의 파시가 연상된다. 아직도 사나운 기운은 남아있지만 한낮의 치열했던 장세는 보이지 않는다. 권력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이 파장에서 마음의 짐을 싸는 모습은 개인 성격에 따라 사뭇 다르다.

대충 네 가지로 나눈다면 그 첫 번째가 자포자기형이다. 대선은 아직도 멀었는데 일부 집권당 사람들은 이미 야당 쪽에 정권을 넘겨준 것처럼 말들을 한다. 민주당의 한 중진 국회의원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전제로 이민 길에 오를 것을 국민 앞에 약속한 바 있다. 이 당의 또 다른 의원은 “당신들이 쓸 예산이니까 깎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말해 일찌감치 한나라당의 집권을 인정하고 있다. 안팎으로 싸움에 능한 이 정당이 한 판 겨뤄 보지도 않은 채 순순히 상대의 손을 들어주는 모습은 기이하다.

▼포기…실속…돌쇠…면피…▼

두 번째는 실리주의형. 조용히 은퇴 후에 대비하는 실속파들을 말하는데 파시에 맞춰 열심히 사저를 준비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이 여기에 속한다. 방 8개, 욕실 7개의 198평짜리 저택은 역대 대통령 사저 가운데 가장 호화로울 전망이다. 청와대는 이 건물을 짓는 데 드는 돈이 강남의 30평형대 아파트값에 불과하다는데 그 건축회사는 일반 국민에게도 같은 가격에 그런 집을 지어줄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왜들 그러는지….

이 정권 들어 야무지게 한몫을 챙긴 후 노후대책을 싸들고 일찌감치 장터를 떠난 사람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 일부 인사는 감옥에 가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너그러운 사법당국이 그들의 거대한 재산은 못본 체 남겨 주었으니 한평생 풍요롭게 살 방도가 마련됐는데 그까짓 몇 달 고생이야 못하겠는가. DJ의 일부 친인척과 측근들이 여기에 속한다.

세 번째 부류는 돌쇠형이다. 어차피 정권이 끝나면 사라질 목숨이니 이 정부와 함께 장렬하게 산화하겠다는 의리의 인사들이다. 안팎 사정으로 나라경제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데도 불구하고 막판까지 재계를 닦달하며 권세의 칼에서 힘을 빼지 않고 있는 공정거래위원장이 대표주자다.

자세히는 몰라도 요즘 검찰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병풍수사 담당 모 부장검사도 이 그룹에 속하지 않을까. 정권이 바뀐 후 최악의 경우 은퇴하고 변호사 개업을 하더라도 애향심 강한 사람들이 도와줘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은 없을 터이니 소신있게 밀고 나가는 것도 처세의 한 방법이리라.

마지막으로 면피형을 들 수 있다. 집권 기간 중의 실책 때문에 다음 정권에서 화를 당할까 슬며시 발을 빼는 인사들을 말한다. 전윤철 경제부총리는 최근 국회 답변에서 “빅딜은 재계 스스로 추진한 것이며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있던 당시나 지금이나 좋은 시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함으로써 이쪽 부류에 가장 근접한 국무위원이 됐다.

1998년 12월 김 대통령 주재 경제장관회의가 ‘빅딜을 강력하게 추진키로 결정했다’는 발표는 정부 주도를 확인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데 이 모임에는 전윤철 당시 공정거래위원장도 참석했다. 이듬해 3월 29일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청와대에서 열린 ‘국정개혁 보고’에서 “빅딜 합의를 재벌들이 지키지 않을 경우 계좌추적권을 활용해 부당내부거래를 집중조사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1999년 12월 21일에는 “올해 ‘정부주도로 진행된 7개 업종의 빅딜’과 달리 업계에서 자발적으로 기업인수합병이 이뤄지는 것은 원칙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빅딜이 성공했더라도 전 부총리는 ‘정부가 주도하지 않은 나쁜 정책’이라고 얘기했을까. 이 정권의 수준 미달 경제정책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국민이 얼마나 세금을 더 내야 했는데 그렇게 해놓고 이제 와서 정부가 관계없었다고 말하면 책임도 없어지나. 이런 사례, 이 부류에 해당하는 고관들은 머지않아 무수히 등장할 것이다.

▼빅딜 공자금 설거지는 쌓이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장터를 떠나든 그건 개인이 선택할 일이다. 그러나 그 뒤끝만큼은 언젠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빅딜, 공적자금, 북한에 돈 퍼준 의혹 등등 수도 없이 제기되는 집권의 개운찮은 찌꺼기들이 그 대상이다. 실패한 경제정책들 때문에 설거지거리는 산처럼 쌓여 있는데 확신이 안 서는 대선은 바득바득 다가오고 있다. 그 분위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설거지로 그릇이나 깬다면 그 부담 역시 국민의 몫이 될 터이니 끝날 때까지가 걱정이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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