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황호택]대중의 두 얼굴

  • 입력 2002년 9월 9일 18시 08분


미국은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은 혼외(婚外) 출생자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 에 가까운 나라이다. 10대 미혼모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한 지 오래이고 이혼과 혼외정사가 만연한 나라에서 고위 공직자의 부적절한 관계를 미주알고주알 따지는 것은 얼핏 납득하기 어렵다.

1987년 유력한 민주당 대통령후보감이었던 게리 하트 상원의원은 감춰둔 정부(情婦)가 드러나 경선 레이스에서 중도 사퇴했다.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는 빌 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 직원의 관계를 조사하는 데 4000만달러나 되는 예산을 써서 포르노물에 가까운 보고서를 만들었다.

▼남에겐 철저, 내 편엔 관대▼

일본은 성도덕이 결코 미국보다 떨어진다고 할 수 없지만 정치인의 혁대 아래에 관한 일에는 관대한 편이다. 총리를 지낸 정치인이 좋아 지내던 게이샤가 죽자 영정을 들고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미국 사회가 고위 공직자들에게 엄격한 도덕률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대중이 부족하고 아쉽게 느끼는 것을 보상받으려는 집단 심리라고 해석하는 관점이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두고 겉치레로 깨끗한 척하는 대중의 위선(僞善)이라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함께 존재한다.

장상(張裳) 장대환(張大煥) 두 총리서리가 언론과 국회의 검증 절차를 통과하지 못하고 총리의 꿈을 접은 후 청와대는 여러 날째 총리감 물색 작업을 하고 있으나 흠 없는 사람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비록 임명동의안이 부결되기는 했지만 장상씨 만한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는 이야기가 임명권자 주변에서 흘러나온다.

개발연대에 기업을 키우고 재산을 모으는 과정에서 다들 눈 감고 아옹 하며 살아온 처지에 심산유곡에서 도 닦은 승(僧)이라면 몰라도 속(俗)의 세계에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그만큼 드물다는 이야기다. 돈 잘 버는 자영업자와 의사 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직 사이에서는 “세금 제대로 내다 보면 문 닫아야 한다”는 말이 보통으로 나온다. 청약 경쟁이 심한 수도권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중산층 이상에서는 아파트를 넓히는 과정에서 위장전입 딱지구입 세금탈루 등 법규 위반을 한 사례가 많다.

서민 사회에서도 준법의식이 희박한 현상을 일상으로 접하게 된다. 노점상은 인도를 무단 점용해 행인들에게 불편을 주고 구멍가게 주인들도 차도와 인도에 예사로 물건을 쌓아 놓는다.

이처럼 평균적인 한국인들이 지키지 못하는 미덕을 총리 후보자에게 요구하는 사회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보면 폭식을 하듯 도덕결핍증 사회가 도덕군자형 총리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풀이가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고위 공직자를 대하는 한국인의 태도에는 도덕결핍증 이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미국인들은 임명직과 마찬가지로 선출직에 대해서도 똑같이 엄정한 잣대를 들이댄다. 한국인들은 선출직에 대해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하기는 고사하고 선거 때마다 천하공지의 전과자들을 국회로 보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총리 후보들을 피의자처럼 몰아댄 국회의원들을 청문회에 세우면 과연 몇 명이나 통과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억대의 뇌물을 받고 교도소에 들어갔던 인사가 얼마 안가 사면복권을 받고 선거를 통해 당당하게 국회에 등원한다. 의원들은 선거를 통해 검증받았다고 큰소리치지만 고질병 같은 지역주의와 학연 혈연 금권이 판치는 선거를 검증이라고 불러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두 총리서리에 대한 인사 청문회는 한국 사회의 도덕률을 질적으로 고양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제 공직에 진출하려는 사람은 친인척 부동산 병역 국적 등 주변을 엄격하게 관리해야 할 것이다.

▼선출직도 엄정한 검증잣대를▼

그러나 정작 대통령 국회의원 시도지사 시군구청장 등 강력한 권한을 가진 수많은 선출직들에 대한 엄격한 검증의 잣대가 없는 것은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 내 편과 남의 편을 대하는 유권자들의 기준이 달라 평균에 훨씬 미달하는 도덕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줄만 잘 서면 임기가 보장되는 선출직 공무원으로 뽑혀 경력 세탁을 한다.

선출된 더러운 손들을 그대로 놓아두고 도덕군자 총리를 뽑았다고 해서 곧 나라가 깨끗해질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부엌 싱크대 밑에서 바퀴벌레가 득실거리게 해 놓고 화장실에서 손을 자주 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직자를 대하는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대중의 태도는 건강한 사회 현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는 물론 총선과 지방선거에서도 총리 후보 검증 과정에서 들이댄 것과 같은 동일한 잣대를 들고 나서야 한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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