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과 사람]"자연은 있는 그대로" 印尼 시르나레스미 마을

  • 입력 2002년 7월 5일 18시 46분


숲과 인간의 '화해' [사진=이훈구기자]
숲과 인간의 '화해' [사진=이훈구기자]

《숲과 사람은 서로를 도울 수도 있지만 그 순환의 균형이 깨지면 서로를 배반하고 훼손하게 된다. 그렇게 어긋난 숲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에 의한 밀림 수탈과 인간 생활의 척박함이라는 악순환의 길을 걷게 된다. 인도네시아 도처에서 이 같은 현상은 확인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숲과 인간이 화해하고 공존할 길을 찾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시르나레스미가 바로 그 마을이다. 이 실험에는 비정부기구(NGO)와 자연 파괴에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까지 힘을 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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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자동차로 6시간을 달려 닿은 서부 자바주(州)의 산촌마을. 해발 300∼600m, 경사 20∼45도의 산비탈에서 1226가구 4440명이 300여년 동안 내려온 전통방식으로 살아가는 곳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와 닿는 것은 남녀노소의 밝은 표정이다. 밝은 태양 빛 아래 소박한 옷차림의 주민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객을 맞이한다.

대나무로 지은 집과 지붕에 널린 식료품,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닭들까지, 누추하지만 자연과 하나된 소박한 손길이 도처에서 느껴진다. 마을은 전기까지 자체 생산하는 자급자족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단정한 마을 모습과는 달리 인근 산과 논밭은 크고 작은 나무와 풀들이 들쭉날쭉 모여 지저분해 보인다. 인간 위주로 자연을 재단하지 않았기 때문. 이곳이 현지인들이 전통적으로 경영해온 ‘라당’이다. 최근 세계적으로도 자연친화적 농법으로 새로 주목받고 있는 혼농임업(混農林業)을 하는 공간이다.

라당에서는 10m가 넘는 야자수 밑에 커피나무, 그 밑에 땔감용 나무와 바나나, 코코넛, 슈거팜트리 등이 층층이 뒤섞여 심어져 있다. 그 아래에서 약초가 자라고 한쪽에는 축사가 자리잡고 있다. 땅을 비옥하게 유지하면서 집약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이다.

마을은 대대로 산과의 공존을 모색해 왔다. 가령 이모작이 가능한 기후지만 논농사는 한번만 짓는다. “땅이 쉴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마을 숲은 경작에 이용되는 생활림, 보호림, 공동체림, 신의 숲, 미래세대를 위한 숲 등으로 구분돼 후손들이 의지해 살아갈 숲은 철저히 보전된다. 쌀은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외지에는 팔지 않는다.

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은 일체다. 정화조용 연못도 그런 사례중 하나. 집집마다 팔뚝만한 민물고기 수십 마리가 헤엄치는 연못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각 가정이 하수들을 정화하는 장소다. 이는 물 속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고 믿는 현지인들의 철학과도 관계가 깊다. 실제로 현지인들은 열대지방에서는 자외선이 강해 오염물질이 물속에서 1㎞만 흐르면 자연정화된다고 말한다.

10m가 넘는 야자수 밑에 커피나무, 땔감용나무, 바나나, 코코넛 등이 뒤섞여 심겨진 '라당'에서 땔감을 정리하는 엄마와 딸

주변 5000여㏊가 마을의 소유였으나 60년대에 이 중 3000여㏊의 숲이 국유림으로 묶였다. 국유림에서는 마구잡이 벌채가 이루어졌다. 주민들은 숱한 협상을 거쳐 최근 정부로부터 인근 국유림 200㏊의 이용권을 얻어냈다. 정부가 심은 마호가니나무 사이에 카사바나 옥수수 등 곡식을 재배하는 대신 수확의 15%를 세금으로 내는 계약관계다.

그러나 이용권을 받자마자 마을회의가 결정한 것은 그 중 가장 기름진 땅에 뿌리의 수분보유 능력이 뛰어난 나무를 심는다는 것. 정부가 그곳 국유림을 벌채한 뒤부터 아랫마을에 홍수가 들더라는 이유에서다. 당장의 수확보다 아랫마을의 안전을 택한 것.

지난해부터 NGO인 RMI(젊은 인도네시아 임학자들의 모임)는 아예 마을에 직원을 파견해마을 주민들의 시도를 돕고 있다. 사상 최초로 마을의 산림지도를 만들고 토양에 맞는 작물을 찾는 작업이 한창이다.

RMI의 라피타 헨다르티 사무처장(31·여)은 “자연친화적이면서도 민주적이며 경제성도 있는 지역 산림 경영의 모델을 만들어 볼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상적인 모델이 만들어지면 인근 36개 ‘형제 마을’들에 이를 전파할 계획이다. 30여개국 정부와 세계은행 등이 출연해 만든 국제기구 국제숲연구소(CIFOR)도 이 마을의 실험에 주목하고 있다. CIFOR의 방문연구원인 서울대 윤여창(尹汝昌·산림자원학) 교수는 “마을공동체가 대안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마을”이라고 말한다.

기자 일행이 마을을 찾은 날 저녁, 마을 원로 10여명이 마을 사랑방격인 부코리(56)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세상 소식을 듣기 위해서다. 한국의 결혼전통에서부터 한국의 숲 경영과 농업방식 등에 대해 끈질기게 묻느라 자정까지도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이들이 현재 진행중인 실험에 성공한다면 시르나레스미 마을은 산과 사람의 ‘지속 가능한 개발’을 이룩한 한 모델로 떠오를 것이다.

서부 자바(인도네시아)〓서영아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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