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시한폭탄’ 정치非理 증시도 떤다

  • 입력 2002년 5월 23일 17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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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증시도 틀렸네. 오늘은 조금 반등하려는 기미가 있었는데 왜 초를 치러 온다는 거야?”

지난해 미국 9·11 테러 직후 몇몇 여야 국회의원들이 폭락한 주식시장을 염려하는 차원에서 증권거래소를 방문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 거래소 직원이 농담조로 한 말이다.

실제로 증권가에는 “주가를 예측하는 각종 지표 중 적중률이 가장 높은 것은 △엔-달러 환율(주가는 엔-달러환율 추이와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음)과 △정치인의 거래소 방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심지어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공직자가 증권가를 방문할 때마다 지수가 10포인트씩 하락한다는 ‘공식’까지 있다.

실제로 정치와 주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사실 한국 증시에는 이와 관련한 종합적이고 정교한 분석 모델이 아직 없다.

정치와 증시의 상관관계가 어떤 때에는 높아졌다가 어떤 때는 낮아지는 등 일관된 흐름을 찾기도 힘들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 걸맞게 두 변수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대통령 임기와 주가〓한국 증시는 일반적으로 대통령 임기 초반에 오르고 후반에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 노태우 김영삼 두 대통령 시절에는 임기 초반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지수 1000을 넘는 대세 상승을 경험했다가 임기 후반 실망감이 누적되며 주가가 폭락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역시 임기 초반 대세상승과 중반 이후 하락을 경험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임기 후반인 올해 다시 경기회복과 주가 대세 상승을 지켜보는 ‘특별한 행운’을 누리고 있다.

▽중소벤처 비리가 문제〓정쟁의 격화 자체는 증시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분석이 지배적. 김일성 주석사망, 9·11테러 등 단발적인 정치적 변고도 장기적 영향을 못 미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야 정쟁의 격화가 중소벤처기업이 연루된 비리의 연쇄 폭발로 이어지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른바 ‘게이트’만 터지면 코스닥은 무조건 얼어붙는다. 또 각종 비리는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려 외국인투자자의 이탈을 야기할 가능성도 있다.

박효진 신한증권 투자전략팀장은 “과거에는 비리가 터져도 ‘원래 대기업과 정치인은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생각한 탓인지 주가에 별 영향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잇따른 벤처 비리는 ‘한국의 중소벤처는 투자할 곳이 못된다’는 생각을 확산시켜 증시의 지뢰밭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불확실성의 문제〓증시는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이 때문인지 일반적으로 대선이 치열하게 진행될 경우 주가는 불안해진다.

미국의 경험을 살펴보자.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000년까지 모두 14번의 대선을 치렀는데 이 가운데 S&P지수가 오른 해가 11번인 반면 내린 해는 단 세 번뿐이었다.

그런데 주가가 떨어진 해 모두 선거가 치열했다. 1948년 해리 트루먼(상대 후보 듀이), 1960년 존 F 케네디(상대 후보 리처드 닉슨), 2000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상대 후보 앨 고어) 모두 피를 말리는 접전을 벌였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주가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

선진국에서는 또 어느 정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개별 주식의 가격이 크게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2000년 미 대선에서 공화당이 이기면 에너지 자동차 담배 등 업종이 유리하고 민주당이 집권하면 기술주가 뜬다는 등의 가설이 성립했다. 정치적 변화에 따른 거시경제 운용의 큰 줄기를 예측할 수 있다. 당연히 증시에서도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며 또한 가능하다.

▽예측가능성의 역설(逆說)〓그러나 한국의 경우 정당별 정책 미(未)분화 현상이 뚜렷하다. 때문에 경제정책에서도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다는 특성이 있다. 그렇다보니 ‘어떤 정당이 집권하든 관계없이 정책은 예측가능하다’는 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반면 정책의 예측가능성과는 달리 ‘비리의 예측가능성’은 매우 불투명하다. 아직 기업인이 은밀히 정치자금을 제공함으로써 정치인에게 ‘보험을 드는’ 풍조가 완전히 불식되었다고 보기 힘든 상황. 투자자들도 “혹시 내가 투자한 기업이 비리에 연루된 것 아닌가”하는 불안감을 늘 안고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측면에서 아직 한국 정치는 증시를 깎아 내리는 요인이라는 지적이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한국 증시에서는 정치와 주가에 관해 솔직하게 진단하기 어렵다. ‘괜히 정치를 잘못 건드리면 큰일난다’는 분위기 때문이다”라며 “이는 권위적인 관료집단, 예측이 불가능한 정치상황 등 한국 정치와 증시의 후진적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증거”라고 말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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