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영광은 짧고 오욕은 길고

  • 입력 2002년 5월 17일 18시 35분


“역사책에서 감미로운 평화의 시기는 여기저기 흩어진 점에 불과하고 고통의 전쟁과 혁명만이 책장들을 검게 뒤덮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홍걸씨가 초췌한 모습으로 검찰에 불려 가는 모습을 보니 문득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한 이 우울한 말이 떠오른다. 김 대통령의 집권 5년도 평화롭고 영광스러웠던 순간들은 짧은 점에 그치고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웠던 나날이 집권기간 대부분을 메우지 않았을까 하는 측은한 느낌 때문이다.

▼˝아들문제는 아버지 책임˝▼

우리 민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영광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감격도 아들을 감옥으로 보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 속에는 하루 낮 춘몽(春夢)에 그친다. 청와대 입성 직후부터 줄기차게 제기되어 온 편중 인사 시비와 세상 만난 측근들의 권세부리기에서 비롯된 민심 이반은 시작에 불과했다. 후반에 접어들어 하루도 대통령 부부에게 숙면의 밤을 허용하지 않았던 세 아들의 비리의혹은 그의 집권시기 전체를 소급해서 어두운 그림자로 덮을 기세다.

우선 셋째아들부터 사법처리됐지만 검찰이 제 기능을 다할 때 나머지 어느 아들인들 아버지가 마음놓을 수 있을 만큼 법과 여론 앞에 당당할지는 의문이다. 채 아홉 달도 안 남은 임기가 끝남으로써 DJ의 수난이 막내리기를 바라는 것조차 이 시점에서는 사치스러운 기대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평생을 민주화 투쟁에 바치고 칠순의 나이를 지나 대통령직에 오른 DJ에게 왜 이토록 가혹한 시련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종이를 자르는 것이 가위의 윗날이냐 아랫날이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이라는 말처럼 홍걸씨 비리의 근원이 주변 독버섯들의 작용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그에 넘어간 당사자에게서 연유한 것인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후 주변이 만들어준 ‘한국적 환경 변화’가 그의 도덕성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면 그것은 그렇게 여기게끔 만든 부모의 책임 또한 작지 않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다름 아닌 김 대통령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식은 아버지의 그림자를 따라가며 자란다는 말이 있는데 아들이 그런 모습이면 민심은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은 1997년 6월 2일 야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서 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김현철씨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있다. (대통령이 되면 자녀의 국정 개입을 차단할 방법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버지가 못하게 하면 된다. 김현철씨 문제는 아버지의 책임이라는 얘기도 그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갑(甲)과 을(乙) 주인공만 바뀌고 반복된 이 오욕의 역사는 집권의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5년 만에 재현됐다. 몇대 전 대통령도 아니고 직전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되는 것을 놓고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DJ가 이렇게 험한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대통령이 되기만 하면 억제할 수 없는 힘,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식들을 타락의 수렁으로 인도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지금 후보들이 모두 큰소리들 치지만 다음 대통령 때도 유사한 일은 반복될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자기 성취적 예언’이 불길하게 와 닿는다.

이런 국가적 비극의 대물림을 단절하기 위해 국민이 할 일은 무엇인가. 일 터진 후 아우성을 쏟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가능하다면 그런 상황을 미리 막는 일이다. 그것이 선거라는 정치행사를 통해 가능하다면 7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어떤 후보를 뽑는 것이 가장 유효한 예방적 행동일까.

▼후보선택 첫번째는 정직성▼

김 대통령은 과거 “나는 한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상황이 나로 하여금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난해한 논리가 그의 정치철학이라면 오늘날의 사태는 이미 예고된 재앙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정치인의 거짓말에 너무 관대했던 우리 국민이 신뢰성 잃은 정권 아래 또 다른 5년을 살지 않으려면 지금 유권자들이 판단해야 할 제1차적 요소는 후보의 정직성이다.

서 있는 위치와 벌어진 상황에 따라 번번이 말이 바뀌고 인생관이 수시로 변하는 후보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새 대통령의 아들이 검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현란한 말로 위기 상황을 모면하는 재주보다 주의주장과 신념이 선거기간 내내 일관되는 후보를 선택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다.

희망을 얘기하기조차 우울한 날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직 선택을 할 미래가 있지 않은가.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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