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누군가 엿듣는다…더이상 숨을 곳이 없다"

  • 입력 2002년 4월 25일 15시 06분


한 기업체의 회의실에서 첨단장비를 이용해 도청되는 주파수 대역을 찾고 있는 보안경비업체 에스원의 도청탐지팀
한 기업체의 회의실에서 첨단장비를 이용해 도청되는 주파수 대역을 찾고 있는 보안경비업체 에스원의 도청탐지팀

“쉿!”

중견 건설업체 A사장은 오후 4시경 집무실을 나서면서 종이에 메모를 해 비서실장에게 건넸다.

‘지금 퇴근할 테니 당장 나가서 알아봐’

비서실장에게 고개를 까딱한 뒤 A사장은 사장실 뒷문을 통해 비상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평소 집무실에 켜 놓는 라디오를 그대로 틀어놓고 사장실 앞 여비서에게도 외출한다는 통보를 하지 않았다. 밖에서 보기에 사장실은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상태다.

잠시 후 비서실장은 회사 밖 공중전화에서 도청탐지업체인 한국통신보안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누가 도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사장실이 비었으니 당장 도청 탐지서비스를 받고 싶은데요. 회사 뒤편에 벤치가 있는데 거기서 뵙죠.”

한국통신보안 탐지팀은 3차례나 약속장소를 옮긴 뒤에야 비서실장을 만날 수 있었다. 도청탐지 검사를 받는다는 사실을 비밀에 붙이기 위해 휴대전화로 계속 약속 장소를 바꾼 것이다. 도청탐지팀이 실장을 만났더니 전화할 때 밝힌 이름과 회사명도 진짜가 아니었다. 회사 근처의 공중전화도 쉽게 믿지 못했던 때문일까.

“영화의 스파이전을 방불케 하는 얘기지만 바로 지난달에 일을 맡았던 고객 얘기입니다. 요즘 한국기업들, 특히 최고경영자(CEO)들은 엿듣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아주 큽니다.”(한국통신보안 안교승 사장)

코스닥시장에서 지난해 엔씨소프트와 함께 최고가주 경쟁을 벌였던 모디아소프트 김도현사장은 매달 타고 다니는 차를 바꾼다. 자신이 경쟁회사 대표의 차량번호를 뻔히 알고 있듯이 자신의 차량번호도 노출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도 자기 소유의 것이 없다. 다른 사람 명의로 된 휴대전화 여러개를 두고 수시로 바꾼다. 김 사장의 이런 ‘이상한 버릇’은 지난해 겪었던 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중요한 계약 건이 있어 직원들도 모르게 거의 혼자 계약을 추진했죠. 그런데 계약도 체결하기 전에 정보가 흘러나가서 증시에 떠돌아다니더군요. 그때 기분은 한마디로 ‘소름이 끼친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어디서 흘러나간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죠.”

이후 김 사장은 아예 휴대용 도청탐지기를 갖고 다닌다.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는 가급적 얘기를 하지 않는다.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을 얼버무리곤 한다.

김 사장처럼 중요한 회의결과나 경영정보가 사전에 흘러나간다는 느낌을 받는 CEO들은 한둘이 아니다. 기자가 이번 취재를 위해 ‘당신이 도청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질문한 기업대표 10명 중 7명은 중요한 회의내용이나 결정사항이 곧바로 경쟁기업이나 사내에 알려진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한번씩 기업에서 도청기가 발견되었다는 보도 등이 나오면 이같은 느낌은 ‘누군가 엿듣고 있다’는 확신으로 증폭된다. 이 때문에 30대 그룹 계열사와 주요 벤처기업들은 정기적으로 ‘도청기 청소’ 작업을 벌인다. 특히 올 들어서는 아예 상시 도청감시시스템을 갖추려는 기업도 늘고 있다.

코스닥 등록기업인 더존디지털웨어는 지난해말 사장실에 상시 도청감시시스템을 설치했다. 이 회사 김택진 사장은 “설마 도청까지 하겠느냐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직원들이 딴 기업도 설치하니 우리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치를 권했다”고 말했다. 도청기 탐지업체인 한국통신보안의 400개 고객 기업 중 절반 가량이 연내 상시 도청감시시스템을 도입할 계획이다.

하지만 도청 탐지서비스를 실시해 도청기를 발견하는 비율은 100개 기업 중 5군데 정도다. 인터뷰를 한 10명의 기업대표에게 △도청 △e메일해킹 △직원의 누설 중 ‘가장 유력한 정보 유출경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모두가 ‘직원이 유출시킬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가장 높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도청’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않고 있었다.

벤처기업인 퓨쳐시스템 김광태 사장은 중요한 사업 얘기가 있을 때는 절대 자신의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다. 경쟁기업이나 정부기관이 엿들을 것이라고 의심해서가 아니다. 도청을 당하고 있다는 증거도 없다. 그저 ‘습관적인’ 행동이다. 김 사장은 “휴대전화에 누군가가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 사장이 우려하는 대상은 뚜렷한 실체가 없는 바로 그 ‘누군가’인 셈이다.

이같은 막연한 불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교통단속카메라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찍힌다거나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폐쇄회로(CC)TV 등을 볼 때 기분이 안 좋지만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여기고 그냥 받아들이잖아요. 그러면서도 잠재의식에는 ‘감시받으며 살고 있다’는 느낌이 자리잡게 되고 당연히 ‘엿보기’와 ‘엿듣기’를 항상 우려하게 됩니다. 특히 일거수 일투족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CEO일수록 이를 더 민감하게 느낀다고 봐요.”

감시 시스템과 프라이버시라는 주제로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는 진보네트워크 장여경 국장의 해석이다. 실제 세계적인 프라이버시 보호단체인 영국의 ‘프라이버시 인터내셔널’이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 영국인이 런던 근교의 집에서 출발해 24시간 동안 런던 도심을 누비면서 CCTV에 찍힌 횟수의 누계는 300회가 넘었다.

CEO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지 기업비밀의 누설만이 아니다. 도청과정에서 자신의 사생활까지 완전히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에 부담감을 느낀다.

신한증권과의 합병으로 요즘 정신없이 바쁜 굿모닝증권 도기권 사장. 차를 탈 때마다 차 안에 설치된 네비게이션 시스템을 보고 있으면 왠지 찜찜하다. 몇시 몇분에 어느 장소에 들렀는지 계기판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자신의 하루 일과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물론 이 정보를 다른 사람이 활용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러나 ‘기록이 남는다’는 자체가 개운치 않다. 더구나 이동통신기술의 발전으로 휴대전화만으로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 파악이 가능해진 세상이 왔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도 사장이 내리는 결론은 하나다. 누구 앞에서도 떳떳할 만큼 투명하게 살든지 아니면 철저히 자기를 감시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기술을 갖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세상이 왔다는 것이다.

전경련으로부터 한국창업투자를 인수한 김정주 사장도 늘 누군가가 자신을 24시간 뒤쫓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사업 관계자를 은밀하게 접대할 경우가 있는데 경쟁기업이 그가 고객을 접대한 장소를 정확하게 안다든지 심지어 오간 얘기까지 꿰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김 사장은 술집에 가서도 말을 아낀다. 얘기를 나누면서도 두리번거리는 버릇까지 생겼다.

6년여간 기업체 사장과 주요인사들 집무실의 도청탐지활동을 해왔던 한국통신보안 안교승 사장. 등단 시인이기도 한 그가 일터의 경험을 담아 쓰는 시들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그의 막다른 느낌을 생생히 드러낸다.

‘바닥에는 라디오, 계산기, 책장, 소파, 화분

천정에는 형광등

벽면에는 열쇠구멍…

온통 둘러보아도 도무지 믿을 구석은 없다.’

(시 ‘쫓고 쫓기고’ 중, 계간 ‘뿌리’ 2001년 겨울호)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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