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홍걸씨를 어쩌려고 저러나…"

  • 입력 2002년 4월 21일 18시 28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97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 홍일(弘一) 홍업(弘業) 홍걸(弘傑) 세 아들을 불러 놓고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고 한다.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으로 이제 더 이상 바랄 게 없게 됐다. 너희들이 먹고 살 만한 돈도 있다. 내가 명예롭게 대통령직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

전임자의 아들이 구속되는 상황까지 지켜본 그로서는 ‘대통령의 아들’이란 위치가 항상 살얼음을 밟듯, 조심해야 하는 ‘형극(荊棘)의 길’임을 이미 꿰뚫어보고 한 말인 듯싶다.

실제 김 대통령은 평소 아들 문제에 대해서는 “야당생활 하느라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하고, 나 때문에 고생만 했다”며 미안함과 측은함을 표시해왔다. 그 중에서도 이희호(李姬鎬)여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혈육인 막내 홍걸씨에 대한 김 대통령 부부의 애정은 각별하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여기까지는 누가 들어도 이상할 것 없는 보통 부모의 심정이다.

문제는 모든 권력이 청와대를 향해 ‘소용돌이’치는 한국적 정치상황 속에서 대통령의 아들은 ‘보통사람’이 아니라 ‘공인(公人)’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성인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의 양자였던 이강석(李康石)씨의 ‘귀하신 몸’ 사건이나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의 국정개입 파문이 상징하듯 아버지와 함께 ‘권력의 전차’에 동승해 있는 것으로 비쳐온 것이 우리 헌정사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소한 지금까지 아들 문제에 대해 김 대통령이 보여온 대처 방식은 김 전 대통령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다.

물론 김 전 대통령도 현철씨의 한보비리의혹이 불거지기 시작한 97년 초 현철씨의 처신에 대한 보좌진의 보고를 받을때마다 “내가 불러다 직접 물어봤다. 그 애는 그런 애가 아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비뇨기과 의사 박경식(朴慶植)씨의 폭로로 현철씨의 국정개입의혹이 드러나자 결국 ‘성역 없는 수사’를 지시해 스스로 고리를 풀었다.

김 대통령도 지난해 말 아들들에게 직접 비리연루 의혹에 대해 추궁했다는 후문이다. 김 대통령은 이에 바탕해 올 초 경제계 인사들과의 간담회에서 “항간에 (허위) 소문이 돌고 있다”고 직접 해명에 나섰다. 그러나 미국 내 호화생활로 물의를 빚고 있는 홍걸씨의 의혹이 점차 구체적으로 드러나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도 청와대로부터는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는 얘기 이외에는 어떤 설명도 들을 수가 없다.

다른 사안도 아닌 최고권력자의 아들들과 관련된 사안의 ‘실체적 진실’의 규명에 최고 권력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점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대통령의 아들이라 해서 ‘마녀 사냥’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홍걸씨의 처신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심지어 친인척들의 입으로부터도 “홍걸이가 말을 안 들어 큰일났다”고 걱정하는 얘기가 들려왔었다. 청와대의 대응을 보면서 “어쩌려고 저러나”는 우려가 생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득 최근 마약복용 소문이 나돌자 검찰조사를 자청해 화제가 됐던 한 여자탤런트의 사례를 되새기면서 ‘당당하다면 무엇이 두려울까’란 생각까지 들었다.

이동관 정치부 차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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