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읽는책]살아있는 자여 봄을 맞자 '죽은 자의 사치'

  • 입력 2002년 3월 15일 17시 25분


요즈음 강의 중에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이 눈에 많이 띈다. 무안주지 않으면서 학생들을 깨우기 위해, “봄에 사람들이 졸음이 많은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한 학생이 “봄에는 나무들이 싹을 틔우느라고 사람들의 기(氣)를 모두 빼앗아 가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봄의 생동감을 되찾기 위해 사람들은 어디에서 기를 빼앗아 오는 것일까?

최근 나는 책꽂이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노벨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죽은 자의 사치’(도서출판 보ㅱ)를 빼내 읽었다. 한 의과대학이 해부용으로 수많은 시체들을 알콜로 채워진 욕조에 보관하고 있다. 수십 년 간 사용해온 그 알콜 욕조 속에는 15년 이상 된 시체들이 갓 들어온 시체들에 눌려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학교당국은 예산을 준 문부성의 감사를 준비하면서 그 시체들을 새 알콜 욕조에 급하게 옮겨 놓기 위해 아르바이트 학생을 모집하는 공고를 낸다. 학교에 충실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도 절망도 없는 한 남학생과, 뱃속에 잉태한 생명을 지우기 위해 돈이 필요한 한 여학생이 이 일을 함께 맡게 된다.

이 위험한 아르바이트, 지하실의 어둠, 오래된 알콜 냄새, 탁한 공기, 그리고 시체라는 견고한 ‘물체’와 씨름하면서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 서게 된다. 남학생은 컴컴하고 습한 지하실에서 바람 쐬러 지상으로 잠깐 나왔다가 새로운 빛과 투명한 공기 속을 가르며 자신 앞을 지나가는 한 간호사와 소년을 바라보며 깜짝 놀란다. 여태 죽은 시체만을 보아왔던 그는 인간이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한편, 여학생은 유산시키고자 했던 아이를 낳겠다고, 아기가 적어도 뚜렷한 피부를 가져보고 죽도록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학생과 여학생은 어렵게 옮겨 놓은 수많은 시체들을 업무 착오 때문에 시체 소각장에 전부 화장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는, 서로 몸을 떨며 웃어 제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줄곧 ‘죽은 자’가 어떤 ‘사치’를 누리는가 궁금해 했다. 알콜 용액에서 오랫동안 썩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치? 새 알콜 욕조로 옮겨지는 사치? 해부용으로 쓰여지는 유용성의 사치? 영혼이 제거된 물체로서의 사치? 화장되어 자연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사치? 그러다가 문득 나는 시체들에게서 남학생이 느끼는 절망을 보았고, 여학생이 기대하는 새로운 생명과 희망을 보았다. 절망, 희망 그리고 생명력, 이들은 살아있는 자들의 소유물이다. 결국, 죽은 자가 누릴 수 있는 사치는 살아있는 자들에게 기를 주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인간은 겨울 같은 죽음에서 기를 얻어 봄을 맞이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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