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욕망은 잡을수 없는 구름인가 '이바나'

  • 입력 2002년 2월 22일 17시 58분


◇ 이바나/ 배수아 지음/ 182쪽 8500원 이마고

김춘수의 세계에서는 ‘꽃의 이름을 불러주자 그것은 내게로 와서 꽃이 된다.’ 그러나 배수아의 세계에서는 이름을 아무리 불러주어도 그것은 내게로 오지 않는다.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욕망하지만 그 욕망의 방향만 가질 뿐, 욕망에 도달할 수 없다. ‘이바나’라는 이름 또한 욕망과 같다. 잡으려 하는 순간 손아귀 밖으로 달아나 버린다. 입자의 위치를 정하는 순간 그 위치는 바뀌어버린다는 물리학의 ‘불확정성 원리’와도 같다.

소설은 초반부에 외면상 ‘로드 로망’의 이미지를 선사한다. ‘나’와 ‘K’는 자동차 ‘이바나’를 타고 난생 처음 만나는 마을들을 찾아 달린다. 이바나는 위치가 명확치 않은 한 옛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다. 또 그것은 소설속 ‘나’가 한때 사귀었던 여인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여인을 사귄 ‘나’가 차를 타고 달린 ‘나’와 동일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줄거리는 외견상 단순하다. ‘나’와 ‘K’는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고 유럽에서 독일어권과 동구권 어딘가를 끝없이 ‘이바나’로 질주한다. 더 이상 대도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들은 우편으로 사직서를 보낸다. 돈이 떨어지자 ‘나’와 ‘K’는 다음 여행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책을 쓰기로 한다. 책 쓰기가 늦어지자 ‘K’는 결국 떠나지 못하게 될까봐 불안해 하고, ‘나’는 책을 쓰는 동안 ‘이바나’가 점점 중요하게 다가오자 책을 다 완성하고 나서야 떠나길 원한다….

‘나’가 그토록 집착하는 이바나란 무엇인가. 자동차인가? 그러나 기종명(機種名)이 아닌 고유명사로서의 자동차의 이름은 일상에서 결국 중요성을 갖지 못하는 이름이다. 주인들은 이름의 유래조차 알지 못한다. 같은 이름의 옛 도시는 곧 이름이 바뀔 처지에 직면해 있다. 여인으로서의 이바나 역시 ‘나’가 자의적으로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이 작품에서 이름들 보다는 오히려 이미지들이 명확하다. 햇빛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날이면 여인의 귀고리처럼 빛나는 차체의 금빛, 중학생들의 장례식 밴드 행렬, 잿빛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집시들의 ‘치고이너 바이젠’, 새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사이 검게 꿈틀거리는, 회흑색 성벽 위의 잉크처럼 어두운 청색 구름….

가정해 본다. ‘이바나’란 구름같이 두루뭉수리하고 모호한, 욕망과 이미지의 일군(一群)일 뿐이라고. 주인공들 또한 욕망과 이미지를 찾는 작가의 여행에 동반하는 얼굴없는 마네킹들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그 이바나는 또한 ‘나’를 추동하는 동력이며, ‘나’가 쓰는 책 편집자를 매혹시키는 거대한 실체로 나타난다.

김포공항 병무사무소에서 오래 근무해온 작가는 지난해 7월 훌쩍 독일로 떠났다. 비행장이 일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작가의 첫 비행체험이었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K’ 등 소설 속의 인물에서 작가의 분신 또는 모델로 짐작되는 인물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 역시 구름과 같은 모호한 짐작일 뿐일 터다.

베를린에 체류 중이라는 작가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책 서두에 실린 작가의 말, 그중에서도 ‘추신’을 읽자 그런 생각은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질문, 특히 내가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질문을 받는 것이 싫다. 그 이유는 내가 효과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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