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눈]정옥자/해인사의 불쌍한 불상

  • 입력 2002년 2월 3일 18시 30분


인류 역사엔 위대한 인물들이 많다. 한 국가나 공동체마다 위인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러한 경계를 넘어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이고 영원한 삶의 지침을 주신 분들이 있으니 바로 종교의 창시자들이다. 연대순으로 보자면 기원전 6세기경 이 세상에 출현한 석가모니를 비롯해 공자, 예수, 마호메트 등이 대표적이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분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분들을 존경하게 된다.

석가모니의 자비, 공자의 인(仁), 예수의 사랑 등이 표현은 다르지만 한결같이 인간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포용, 사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탐욕을 경계하고 절제를 미덕으로 삼고 있다. 영원한 우주의 작은 점 하나로 이 세상에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져 갈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깨우쳐 주고 이 유한한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거액들여 거대불상 추진▼

그런데 ‘종교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되어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 분들의 가르침을 역행하는 현상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서울 강남의 교회들이 교인의 수로 교세를 과시하고 교회 건물을 대형화하며 크기 경쟁을 하더니, 급기야는 교회를 사유재산같이 아들에게 물려주는 풍조까지 생겨나 세습화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불교계에선 불상(佛像) 크기 경쟁이 한창이다. 그동안 동화사, 낙산사, 신흥사, 법주사 등이 불상 거대화 작업에 한몫하더니 최근엔 해인사가 200억원의 예산으로 43m의 불상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13층 아파트 높이다. 법주사의 노천불이 27m이므로 이왕이면 그보다는 커야 하지 않겠느냐는 발상인지, 불상 크기로 사찰의 힘 겨루기를 하려는 생각인지 모르겠다. 일본과 중국에도 거대 불상을 조성한 예가 있다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다. 외국에서 하는 일이라고 무조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상식과 기준을 세워야지, 외국의 잘못된 선례까지 따라서는 안 될 것이다.

불상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제자들이 큰 가르침을 준 그분의 모습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되어 경전을 토대로 재현한 것이다. 2세기 초 인도 서북부 간다라 지방에서 조각예술이 발달한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처음 제작되었다. 그야말로 부처님 살아 생전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싶은 희망의 표현인 셈이다.

역사적으로 평화의 시대엔 모든 건축물이나 예술품이 작고 섬세해지는 반면 무력을 숭상하는 전쟁의 시대엔 크고 거칠어지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세운 오사카 성은 크고 금으로 도배하듯 해 과시욕을 보이고 있는 반면, 교토의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문화유산들은 작고 섬세하다는 것은 정평이 나 있다. 전자는 전쟁을, 후자는 평화를 선택했었다.

평화를 사랑하며 문화국가를 자부하던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역시 축소지향적이었다. 중국에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지만 우리나라에 오면 작고 섬세하고 세련되어졌다. 석굴암이나 청자 등이 그 예이다. 독자적 고유문화를 꽃피운 조선시대 왕릉의 석물들도 문(文)을 숭상한 시대에는 작고 세련된 반면, 무(武)를 숭상하는 시대에는 크고 거칠어지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현대에 와서 불상을 거대화하려는 욕구가 여기저기서 분출되는 것은 제국주의적 사고의 산물이기도 하다. 부국강병으로 세계를 제국화하려는 이데올로기가 종교를 오염시켜 불상마저도 거대하게 만들어 사람들을 제압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불심은 불상크기순이 아닌데▼

불교에서는 ‘비움의 가르침’이 중요하다고 한다. 불상을 거대화하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는 아닐까.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가깝게 있고 자비롭게 다가가야 야 할 불상을 무엇 때문에 거대한 괴물로 만들어 부처님을 욕되게 하려는지 이해가 안 된다. 더구나 가야산의 명승을 해치면서까지 말이다. 일반인에게 이 거대 불상이 안겨줄 위화감을 생각해 보았는지 묻고 싶다.

거대 불상 조성을 아무리 해인사 땅에서 해인사 돈으로 한다 하더라도 크게 보면 국가재화의 낭비라 할 수 있다. 이번 불상 조성을 계기로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기존의 사고를 일신하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면 한다. 부처님의 진면목을 표현하는 크기로 하면 좋으련만…. 거기에서 절약되는 재화를 빈민구제에 돌린다면 부처님을 경배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정옥자 서울대교수·국사학·규장각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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