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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2월 21일 17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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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정현경 지음/240쪽 1만2000원(CD포함) 열림원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잘 차려진 ‘밥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외국 음식처럼 코스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한꺼번에 내오는 한국의 밥상 말이다. 정현경은 그런 사람이다. 무언가를 숨겼다가 차례차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 드러내 보이는 사람. 그 솔직함이 그녀에게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게 하였으리라.
정현경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비상함을 알고 있던 터인데다 그녀가 이 책을 아주 오래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서 쓴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한장 한장 조심스럽고 천천히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읽었다. 역시 정현경이 차린 상에는 내가 기대했던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는 세계적인 진보신학의 명문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 그 165년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 여성 종신교수가 되기까지 20년 넘게 신학을 공부하며 신학마저도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 식민주의, 제국주의, 남성우월주의에 오염돼 있다고 느꼈고, 기존의 가부장적인 교회, 신을 설명하는 신학이 아닌, 신을 ‘표현’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자신을 얽어매는 모든 사슬과 편견을 떨쳐 버리고자 했던 한 여인의 삶과 영혼의 속살을 고스란히 보는 것은 어쩌면 사람에 따라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밥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후의 소화불량은 결코 질병의 징후가 아니다. 오히려 온 몸 구석구석으로 흡수되기 위한 전초전과 같은 역할을 한다. 다 먹고 난 후에 단번에 소화되지 않는 묵직함. 이러한 소화불량의 상태를 한동안 겪고 난 후에 서서히 흡수되어서 몸에 이로운 자양분이 되리라 생각된다.
상에 차려진 음식들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나는 형형색색의 비쥬얼들을 깊고 고요하게 느낄 수 있었다. 빨강색, 핑크색, 보라색, 초록색, 연두색, 코발트색, 검정색, 흰색이 저마다 개성있는 빛을 발하되, 서로 조화되어 하나로 흐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를 ‘분노’하게 했던 일련의 사건들이 ‘생명’ 에너지로 화하면서 무념무상의 ‘고요’로 흐르고, 결국엔 모든 것을 끌어안는 ‘정화’의 경지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는 ‘미래에서 온 편지’에서는 순백색의 정화된 여신의 목소리로 이 세상의 딸들에게 축복과 격려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책은 거칠면서도 부드럽고 씁쓸하면서도 달콤하다. 역겨우면서도 향기롭다. 화려하면서도 현란하지 않다. 거슬리면서도 그 선율은 너무도 아름답다.
책을 덮으니, 웃음이 나온다. 통쾌한 웃음, 씁쓸한 웃음, 안쓰러운 웃음, 삐닥한 웃음, 즐거운 웃음, 그리고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웃음들. 그리고 서서히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자유라는 이름의 날개를 달고 아름답게 비상하는 그녀가 보이는 듯했다.
이 세상의 모든 딸들, 가부장제의 권력 아래에서 숨막혀 하는 수많은 여성들, 열린 눈으로 세상을 편견 없이 보는 맑은 눈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타인에게 분노를 일으킨 용서받을 사람들도 이 책을 통해, 이 책이 전하는 온갖 종류의 웃음을 통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홍신자(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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