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이회창 총재의 밑그림

  • 입력 2001년 11월 19일 18시 28분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 자리를 내놓은 데 대한 여론의 반응은 대체로 잘 했다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부정적 시각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이른바 정치 9단이라는 DJ가 아무런 대책 없이 여당 총재직을 내놓았겠느냐, 필시 무슨 암수(暗數)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두고 봐야 한다는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다. 한나라당측은 여권이 결국 ‘비(非)DJ-반(反)이회창(李會昌) 신당’을 앞세워 정계개편을 시도할 것이란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둘째, 대통령제와 정당정치 아래에서 대통령이 여당 총재직을 내놓는 것은 책임정치를 외면하는 ‘무책임한 짓’이 아니냐는 것이다.

암수가 숨어 있는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고, 책임정치를 외면한다는 비판도 원론적으로 틀린 지적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 현실에서 대통령이 여당 총재직을 계속 갖고 있다고 해서 책임정치를 다할 수 있을 것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反DJ 정서’와 相生정치▼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지역당 구조에서 여야 상생정치란 사실상 정치적 수사(修辭)에 그치기 쉽다. ‘반DJ 정서’를 등에 업은 한나라당과 이회창 총재로서는 DJ와의 상생에 일정한 한계를 둘 수밖에 없다. 한계를 넘어서면 ‘반DJ 표’가 날아간다는 데야 집권을 목표로 하는 야당이 그걸 무시할 도리가 없을 것이고, 여권은 그래서 야당이 ‘발목잡기’를 한다고 본다. 그동안 여야가 여러 차례 영수회담을 하고 상생정치를 약속하고도 돌아서기가 무섭게 등을 돌려온 밑바닥에는 그런 구조적 불신이 짙게 깔려 있다.

한국 사회의 통합과 질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지역주의야말로 이 시대에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다. 그러나 지역주의가 현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란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내 탓’만은 아니라지만 이 정부 들어 지역갈등이 더욱 심화된 것은 김대중 정부의 최대 실책으로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측면이 없지 않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대통령이 여당 총재직을 갖고 사사건건 야당과 부딪혀서야 국정운영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 더구나 한국의 가부장제적 정치문화에서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임할 때 생기는 폐해 앞에 책임정치론은 무색하다. 김 대통령은 97년 5월19일 당시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당의 자율성과 국회의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대통령에 당선되면 총재직을 사퇴할 것”이라고 공약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당은 줄곧 청와대의 종속물로 존재했다. 자율성 없는 정당과 거수기로 변한 국회의원으로 정당정치가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한국정치의 후진성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됐다. 그러고 보면 김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을 너무 늦게 지킨 셈이다.

민주당의 정균환(鄭均桓) 의원은 “김 대통령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는 역사적으로 3김시대의 종식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3김 이후의 정치’를 지금의 여야가 어떻게 만들어 나가느냐는 것이다. ‘3김식 정치’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1인보스 정치다. 이제 이것을 깨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정당이 민주화되고 국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정치의 기본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표정관리 할 때인가▼

그러나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민주당은 ‘제2의 창당’을 하겠다고 하지만 대선 예비주자들은 벌써부터 세몰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이다. 한나라당은 마치 이미 집권을 한 것 같은 분위기다. 하기야 이 총재가 여권의 어느 대선 예비주자와 견줘도 우세하고 국민의 한나라당 지지도가 민주당의 두 배에 가깝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그런 분위기가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지금의 지지도에 ‘반DJ 정서’에 따른 반사이익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결코 낙관할 단계가 아니다. 유권자의 60%는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얼마 전 한나라당에 입당해 국가혁신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김용환(金龍煥) 의원은 “국가개조 차원의 변화가 없으면 정권교체의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이제 그 구체적 밑그림을 내놓아야 한다. 표정 관리 할 때가 아니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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