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30초의 승부’

  • 입력 2001년 11월 16일 18시 07분


4년 전 이맘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시 대권후보였던 이회창씨의 압박을 못 이겨 쫓겨나듯 당을 떠난 것과 달리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는 자식들의 다툼에 식상한 가장이 ‘너희들끼리 잘살아 보라’며 가출한 것과 같은 모습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집안싸움의 결과라는 공통점이 있다. 어차피 정권 말기에는 집권당 내 ‘유산’ 쟁탈전이 필연적이지만 문제의 정당은 흡사 존립목적이 당원간 투쟁에 있는 듯 가장의 가출 후 내분은 가열되고 있다.

이번 파동이 재·보선에서의 여당 패배로 촉발되었다는 것은 상식적 일인데 중요한 것은 왜 민심이 집권당을 떠났느냐 하는 점이다. 적을 너무 많이 만든 것도 문제였지만 경제부진은 또다른 큰 요인이다. 국제적 영향이라고는 하나 불황의 원인이 어디 있든 배부르고 등 따습기 원하는 국민이 인정할 만큼 우리 정부의 대응이 적절했느냐 하는 것은 의문이다.

▼심상찮은 공무원 사보타주▼

여기에 덧붙여 경제적 이권마다 ‘조폭’과 연계된 권력기관과 민주당 인사들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자본주의의 기본인 기회의 공평성이 파괴된 것도 국민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위법사실이 안 드러났다는 당사자들의 항변은 의미가 없다. 집권당 실세들의 끝없는 청탁과 압력에 재계에서 ‘질릴 정도’라는 말이 나온 지 언젠데 유권자들이 그걸 모르고 지나가 주기 바랐다면 이는 과욕이다. 그런 민심이 선거결과로 나타났을 뿐이다.

선거에 패배한 민주당은 ‘그러니까 경제부터 살리자’며 팔 걷어붙이고 나서기보다 엉뚱하게도 세력다툼으로 날을 지새웠고 그 결과 총재가 당을 떠나는 희한한 상황을 맞았다. 결과는 봐야겠지만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가 정치적 혼란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다면 그 책임은 떠난 사람과 떠나게 한 사람들 모두의 몫이다.

특히 대통령이 차기 후보도 점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총재직을 버렸을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공무원들의 움직임이다. 공직자들은 이미 골치 아픈 일이 닥치거나 야당이 지나치게 견제하는 정책은 ‘싫으면 그만두라, 다음 정권에서 잘해보라’는 식으로 일을 내팽개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기업규제 완화문제를 다음 정권(3년 뒤)으로 미루겠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대선은 이미 판가름났고 장관들의 운명은 벌써 정권과 함께 끝난 것 아니냐는 느낌마저 든다.

내년 봄 고비를 맞을 하이닉스반도체 처리문제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상징적 케이스가 될 가능성이 크다. 다음 정권에서 청문회가 열린다면 0순위로 꼽힐 이 사안도 지금껏 일을 저질러 놓은 정부가 뒤늦게 책임 안지기 식으로 나올 경우 그 부담은 당연히 다음 정권으로 넘어간다. 개혁과 구조조정을 원점으로 돌릴 가능성이 있는 관리들의 사보타주는 경계의 대상이다.

정치상황이 5년 전과 유사한데 경제 또한 그 때와 붕어빵처럼 닮아간다. 설비투자는 밑도 끝도 없이 줄고 수출은 바닥을 기는데 중국이라는 강력한 변수는 날이 갈수록 위협을 더해 가고 있다. 사면초가의 우리경제에 공교롭게도 내년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실을 다져야 할 역사적 시기인데 정치권은 일찌감치 세력싸움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그 후의 경제는 안 보아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정권말기에 인상 좋아야▼

정권 말기에는 꼭 그 때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또 시기적으로 꼭 그 시점에서만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일들이 무엇인지 찾아서 의연하게 집행한다면 정권은 지금까지의 과오를 어느 정도는 지울 수 있을 것이다. 권투선수들이 심판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 매 라운드 마지막 30초에 최선을 다하는 것과 같은 이론이 정치에서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김 대통령이 진정으로 역사 속에 훌륭한 지도자로 각인되고 싶다면 가야 할 길은 바로 그 쪽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재선될 수 있었던 것도, 모니카 르윈스키와 별 이상한 짓을 다해 갖은 수모를 겪었지만 물러난 이후 계속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경제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북쪽에 대한 헛손질에, 죄 없는 관중에 대한 화풀이에 힘이 빠져 남은 시간 견디는 것 자체가 힘겨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머지 30초’동안 경제에 화끈한 인상을 줄 수 있다면 경제도, 정권에 대한 평가도 함께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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