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오래도록 익힌 사색의 열매 '야윈 젖가슴'

  • 입력 2001년 11월 9일 18시 42분


야윈 젖가슴/이청준 산문집/170쪽 7500원 마음산책

소설가 이청준씨(62)는 7년 만에 낸 산문집을 ‘이삭줍기’라 지칭했다. 그 ‘이삭’이란 초등학교 때 가족 눈치를 보며 읽었던 연애소설 ‘순애보’(박계주)이거나, 추운 겨울날에도 찬 우물물에 세면하고 의관을 반듯이 하고 글을 읽던 동네 한문서당 훈장 어른의 고지식함 같은 것들이다.

하찮아 보이는 그 이삭은 작가의 비옥한 경험 위에 싹을 틔워 든든한 성찰의 나무로 자란다. 느릿느릿한 품새로 사분사분 쓰여진 산문이 남기는 울림은 넓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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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마을 ‘섭섭이 할머니’에게 빌린 ‘야윈 젖가슴’을 보자. 백발의 작가는 흘려버렸던 빛 바랜 추억에서 사금파리 같은 깨달음을 건진다. “모진 세월에 졸아붙은 젖가슴”이란 실은 “자식들에게 다 나눠주고도 차마 다 마르지 못한 당신의 사랑의 씨앗주머니”였음을.

평소에 책과 벗해온 독자라면 이씨가 풍기는 문향(文香)에 매혹될 것이다. ‘칼의 노래’(김훈)에서 영상문화에 짓눌린 문자예술의 자구력이 될 고(古)문체의 고졸성을, ‘한시미학산론:시담사화’(정민)에서는 절제와 함축성의 덕목이라는 한문학의 귀감을 배운다. ‘내 생애 단 한 번’(장경희) 같은 에세이집에서도 “사랑 이야기는 그것을 말한 사람 자신이 지닌 만큼밖에 말할 수 없음”을 능히 깨닫는다.

문학권력에 대한 삭막한 언사가 난무하는 요즘, 다시 읽은 ‘광장’(최인훈)에서 찾은 망명의 의미 역시 각별하다.

“‘문학은 현실 개선의 꿈’이란 말 속엔 그 전위적 진보성이 생명력으로 숨쉬고 있다. 그런데 어떤 정치가 어떤 문학을 보수나 수구로 매도한다면 그 정치의 자리는 어디이며, 그 문학은 어디에 자리해야 하는 것일까.”(51쪽)

오래 숙성시켜 꺼내 놓은 잠언들은 성찰의 나무에 달린 열매와도 같다. “수평선 단상-넓어지려면 단순해질 일이다” “추억-세월의 강심 아래로 가라앉은 회수 불능의 시간 보석”같은 문장이 남기는 잔향이 그윽하다.

발향지(發香地)는 바로 동네 아저씨 같은 품새로 찍힌 작가 사진 옆에 붙인 짧은 글이었으니.

“낚시터에서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 / 물 가운데로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면서 / 문득 내가나를 버릴 수 있음을,/ 내가 아픔 없이 나를 작별할 수도 있음을 알았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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