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청준씨(62)는 7년 만에 낸 산문집을 ‘이삭줍기’라 지칭했다. 그 ‘이삭’이란 초등학교 때 가족 눈치를 보며 읽었던 연애소설 ‘순애보’(박계주)이거나, 추운 겨울날에도 찬 우물물에 세면하고 의관을 반듯이 하고 글을 읽던 동네 한문서당 훈장 어른의 고지식함 같은 것들이다.
하찮아 보이는 그 이삭은 작가의 비옥한 경험 위에 싹을 틔워 든든한 성찰의 나무로 자란다. 느릿느릿한 품새로 사분사분 쓰여진 산문이 남기는 울림은 넓고 깊다.
고향 마을 ‘섭섭이 할머니’에게 빌린 ‘야윈 젖가슴’을 보자. 백발의 작가는 흘려버렸던 빛 바랜 추억에서 사금파리 같은 깨달음을 건진다. “모진 세월에 졸아붙은 젖가슴”이란 실은 “자식들에게 다 나눠주고도 차마 다 마르지 못한 당신의 사랑의 씨앗주머니”였음을.
평소에 책과 벗해온 독자라면 이씨가 풍기는 문향(文香)에 매혹될 것이다. ‘칼의 노래’(김훈)에서 영상문화에 짓눌린 문자예술의 자구력이 될 고(古)문체의 고졸성을, ‘한시미학산론:시담사화’(정민)에서는 절제와 함축성의 덕목이라는 한문학의 귀감을 배운다. ‘내 생애 단 한 번’(장경희) 같은 에세이집에서도 “사랑 이야기는 그것을 말한 사람 자신이 지닌 만큼밖에 말할 수 없음”을 능히 깨닫는다.
문학권력에 대한 삭막한 언사가 난무하는 요즘, 다시 읽은 ‘광장’(최인훈)에서 찾은 망명의 의미 역시 각별하다.
“‘문학은 현실 개선의 꿈’이란 말 속엔 그 전위적 진보성이 생명력으로 숨쉬고 있다. 그런데 어떤 정치가 어떤 문학을 보수나 수구로 매도한다면 그 정치의 자리는 어디이며, 그 문학은 어디에 자리해야 하는 것일까.”(51쪽)
오래 숙성시켜 꺼내 놓은 잠언들은 성찰의 나무에 달린 열매와도 같다. “수평선 단상-넓어지려면 단순해질 일이다” “추억-세월의 강심 아래로 가라앉은 회수 불능의 시간 보석”같은 문장이 남기는 잔향이 그윽하다.
발향지(發香地)는 바로 동네 아저씨 같은 품새로 찍힌 작가 사진 옆에 붙인 짧은 글이었으니.
“낚시터에서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 / 물 가운데로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면서 / 문득 내가나를 버릴 수 있음을,/ 내가 아픔 없이 나를 작별할 수도 있음을 알았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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