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조폭적' 하이닉스 해법

  • 입력 2001년 11월 1일 00시 57분


31일 오후 5시 외환은행 본점.

하이닉스반도체 지원방안을 결의하기 위한 ‘금융기관협의회’를 앞두고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을 비롯해 한빛 산업 조흥은행 임원들의 표정은 밝았다. 반면 신한 한미 하나 제일 국민은행의 임원들은 묵묵히 회의장에 들어갔다. 적게는 수백억원에서 많게는 1000억원이 넘는 손실을 입게 될 안건에 찬성표를 던져야 하니 마음이 가벼울 리 없다.

이날 하이닉스 지원안은 통과됐지만 ‘안 자체가 설득력 있고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통과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외환은행은 30일 시중은행에 “지원안에 동의하지 않는 은행은 ‘청산가치 기준’으로 부채를 탕감토록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첩했다. 채권의 85%가량을 포기하라는 뜻이다. 기업을 살리겠다면서 계속기업가치가 아닌 청산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것도 쉬 납득하기 힘든 대목.

외환은행은 나아가 탕감후 남은 15%가량의 채권은 5년만기 하이닉스 회사채로 받아가도록 했다. 한마디로 ‘반대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은행들은 “말도 안된다”며 펄펄 뛰었지만 결국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동의했다. 동의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도록 지원안이 사전준비된 것이다.

하이닉스에 많이 물린 은행들이 덜 물린 우량은행들을 윽박지르는 모습. 부실은행일수록 큰 소리 치는 것은 한국 금융계에서나 볼 수 있는 비극적 패러독스였다.

정부계 은행이 민간 상업은행을 억압하는 측면도 있었다.

정부와 주요 채권은행은 이렇게 하이닉스를 살리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경제의 기본질서가 무너지는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 ‘친구’의 흥행 성공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는 “조직폭력배가 미화되며 조폭 문화가 만연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날 주채권은행은 마구잡이 식으로 밀어붙이고 나머지 은행들은 한마디 말도 못하고 끌려가는 모습은 영화에서 본 ‘조폭적 해법’과 무엇이 다른가.

<김두영기자>nirvana1@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