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여당 최고위원도 겁내는 도·감청

  • 입력 2001년 10월 19일 18시 42분


엊그제 여당의 한 최고위원이 자신에 대한 도청을 우려하는 발언을 한 것은 우리 사회의 도청(盜聽) 감청(監聽)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는 “누가 도청장치를 찾아내는 거라고 기계를 줘서 집에 가서 실험해보니 벽에서 ‘삐삐’ 소리가 들리더라”고 했다.

그는 얘기 끝에 ‘유신시절의 일’이라고 얼버무렸다지만, 하물며 집권당의 최고위원이 이런 걱정을 할진대 그밖의 사람들이 도·감청에 대해 가질 공포감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간다. 최근에는 모 벤처기업의 주식분쟁사건 축소수사 의혹과 관련해 사건 진정인과 검사 사이에 오간 적나라한 대화가 ‘녹취록’으로 나와 세간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전화로는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게 상식처럼 돼 버렸다. 몇 달 전 야당 총재는 휴대전화를 3대, 같은 당 사무총장은 5대씩 갖고 다닌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언론사나 주요 기업 기관의 간부들 중에도 도·감청 공포에서 자유롭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아무리 불신(不信)과 불화(不和)의 시대라지만, 틈만 나면 ‘인권 선진국’임을 자랑하는 이 정부 하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런 현상이 분명 정상은 아니다.

국가기관이 영장을 발부받아서 하는 감청 역시 위험 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얼마 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낸 보고서에 따르면,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이 규정한 감청 대상 범죄는 150여 종으로 웬만한 범죄 수사에 다 쓰일 수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감청 허용기간(3개월에서 6개월) 또한 지나치게 길어 인권 침해 소지가 큰 것으로 밝혀졌다. 개인이나 국가 모두가 ‘남의 말 엿듣기’에 혈안이 돼 있는 판국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된 셈이다.

도·감청이 보편화되면서 가져올 결과는 극도의 상호 불신과 사회 분열뿐이며 종국에는 전면적인 인권 침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힘있는 권력기관이 자의적으로 실시하는 감청은 당장은 편리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정권의 정당성과 국가의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도·감청 문제는 엄중하게 다뤄야 한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도청장비의 유통망을 철저히 단속하는 한편 개인의 불법 도청을 가려내 엄단하고, 국가기관의 감청 역시 엄격한 조건 하에서 제한적으로만 허용되도록 통신비밀보호법의 개정이 하루 속히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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