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찰스 바클리보다 불쌍한 한 선수의 이야기

  • 입력 2001년 9월 28일 12시 01분


NBA에서 뛰는 모든 선수들은 어마어마한 돈이 가져다 주는 행복을 우선적으로 맛보게 된다. 연봉의 개념이 기타 다른 농구 리그와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돈 맛을 알게 된 선수들은 차츰 '승리'가 가져다 주는 매력에 흠뻑 취하게 되고, 그 최종 목표가 바로 NBA 챔피언쉽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NBA 챔피언쉽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면 여러분은 어떤 선수가 가장 먼저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가? 우승 제조기 Bill Russell? 황제라 불리우는 Michael Jordan? 아마 리그를 좌지우지했던 많은 선수들이 우선적으로 떠오를지 모르나, Charles Barkley, Karl Malone & John Stockton, Patrick Ewing과 같은 선수들을 먼저 생각해 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후자에 열거한 위 선수들은 모두 지난 1997년, NBA가 선정한 '위대한 50인' 멤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은 NBA 우승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흔히 쓰는 표현에 따르자면 '무관의 제왕' 정도?

위의 선수들 가운데 팬들로부터 가장 많은 동정을 받았던 선수는 Charles Barkley가 아니었을까? '코트의 악동'이라는 출처 모를 별명답게 많은 팬들이 사랑했고, 또 그러한 팬들의 사랑에 뛰어난 실력으로 보답했던 역대 최고의 PF 중 하나였던 그는, 92-93시즌, 피닉스 선즈 유니폼을 입고 Jordan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와 명승부를 펼쳤으며, 이후 꾸준히 정상을 넘보았지만 Mario Elie와 John Stockton이 만들어낸 플레이오프 하이라이트 장면의 희생양이 되면서 우승과 조금씩 멀어져 갔던, 은퇴와 번복을 거듭하면서 챔피언쉽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뿜어냈던 선수, 그러나 결국 챔피언쉽 링 하나 없이 은퇴해야만 했던 정말로 불쌍했던 선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두고 'Jordan 때문에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선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아주 오래 전, NBA에는 Barkley와 닮은꼴 선수가 한 명 있었다. Barkley가 6-6의 PF 라면, 이 선수는 6-5의 PF, 즉 Barkley처럼 리그 내에서 단신 PF였는데, Barkley보다 더 불쌍하면 불쌍했지 절대 못하지는 않다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다. 이 선수도 NBA 우승 경험이 없어서? 물론, 그렇다. 그럼 혹시 이 선수도 시대를 잘못 만난 것? 그 역시, 물론이다.

'칠전 팔기'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 '7번 넘어지고 결국 8번째에서도 넘어졌던' 한 선수를 소개할까 한다. Elgin Baylor가 바로 그의 이름이다.

최고가 되기를 원했던 사나이 'Elgin Baylor'

NCAA 파이널 포 MVP는 보통 챔피언 팀에서 배출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총 63명의 파이널 포 MVP가 배출되었는데, 이 중에서 非 챔피언 팀에서 MVP가 배출되었던 경우는 총 10번이 있었다. 역대 파이널 포 MVP를 살펴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1956년부터 1959년까지, 4년 연속 NCAA 토너먼트 파이널 포 MVP의 영광은 모두 비 챔피언 팀 선수에게 돌아갔다는 점이다. (이는 뒤에서 한 번 더 언급하겠다.)

1958년, 시애틀 대학을 NCAA 토너먼트 결승에 진출시켰던 Elgin Baylor는 팀이 우승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이널 포 MVP를 차지한 후, 그 해 NBA 드래프트에서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에게 전체 1순위로 지명되었다.

당시 레이커스는 NBA 최초의 'Dominant player'였던 George Mikan의 은퇴 이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Baylor의 입단으로 인해 크게 달라졌다. 평균 24.9득점, 15.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한 Baylor의 뛰어난 활약에 힘입어 레이커스는 58-59 시즌, 지난 해보다 14승이 더 많은 33승을 거두었으며, 그 해 NBA 파이널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Baylor에게 승리의 기회 따위는 없었다. 상대는 Bill Russell이 이끄는 전설의 보스턴 셀틱스였기 때문이다. 셀틱스는 레이커스를 4승 무패로 가볍게 제압했고, 58-59 시즌, NBA 대권을 차지했다. 한 가지 재밌는 건 Baylor가 총 8번의 NBA 파이널 도전 가운데 첫 번째 실패를 겪어야만 했던 1959년, 보스턴 셀틱스의 위대했던 리그 8연패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1960년, 레이커스는 구단 연고지를 미네아폴리스에서 지금의 로스 엔젤레스로 옮겼고, 연고지 이전과 함께 레이커스는 그들의 로스터에 또 한 명의 슈퍼 스타를 추가하게 된다. 바로 NBA 로고의 주인공인 Jerry West.

Baylor와 West의 만남은 1960년, LA 레이커스라는 새로운 팀의 시작과 함께 했다. Baylor는 60-61 시즌,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73경기에 출전, 평균 34.8득점, 19.8리바운드, 5.1어시스트를 기록한 것.

61-62 시즌, 레이커스는 평균 30.8득점을 기록하는 발군의 활약을 펼친 Jerry West의 활약에 힘입어 다시 한 번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레이커스의 파이널 상대는 리그 3연패를 노리던 보스턴 셀틱스.

셀틱스에게 있어서 West가 가세한 레이커스는 2년 전 만큼의 만만했던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시리즈는 결국 셀틱스의 4승 3패 승리로 끝이 났으며, 레이커스와 Baylor는 다시 한 번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61-62 시즌 NBA 파이널 5차전만큼은 Elgin Baylor가 보스턴 셀틱스보다 위대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Baylor는 이 날 경기에서 리그 최고 수비팀을 상대로 61득점, 2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의 126-121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를 현대의 유행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엽기' 그 자체이다. Baylor는 이 경기를 통해 NBA 플레이오프 단일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고, 이는 '인간의 모습을 가장해 등장한 신'이라 불리우는 Michael Jordan이 1986년,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두 차례의 연장전 끝에 63득점을 기록할 때까지 무려 24년 동안 굳건히 정상의 자리를 지켰던 대기록이었다. 물론, 여전히 NBA 파이널 단일 경기 최다 득점.

Baylor와 레이커스는 이후 8년 동안 무려 6번이나 NBA 파이널에 진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 앞에는 여전히 보스턴 셀틱스가 산처럼 버티고 있었고, Baylor가 NBA 파이널에서 셀틱스를 상대로 마지막으로 뛰었던 69-70 시즌까지 레이커스는 단 한 번도 셀틱스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 와중에 셀틱스는 리그 8연패라는 프로 스포츠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작성했으며, Elgin Baylor는 1963년, 훗날 그를 두고두고 괴롭혔던 무릎 부상을 처음으로 앓기 시작했다.

Baylor가 마지막으로 셀틱스를 상대했던 68-69 시즌 NBA 파이널, 레이커스에 Wilt Chamberlin이라는 걸출한 빅 맨이 가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3승 4패로 또 다시 패배했다. 셀틱스는 68-69 시즌 우승으로 인해 13 시즌동안 무려 11차례나 우승하는 대업을 이루며, 'Celtic Pride' 시대를 마감했다. 셀틱스의 11번의 우승 중에서 7차례는 Baylor의 레이커스가 그 제물이 되었다.

Bill Russell의 은퇴로 인해 69-70 시즌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Chamberling-Baylor-West가 이끄는 레이커스는 다시 한 번, NBA 파이널에 도전했다. 레이커스의 상대는 바로 뉴욕 닉스였다. 닉스는 5차전까지 3승 2패로 리드해 나갔으나, 5차전 도중 팀의 기둥 센터였던 Willis Reed를 발 부상으로 잃는 치명적인 전력 누출을 감수해야만 했다. 레이커스는 6차전, Reed의 공백을 틈타 45득점, 27리바운드를 기록한 Chamberlin의 활약에 힘입어 시리즈를 7차전까지 몰고 가는데 성공했다.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법한 '위대한 컴백'이 나오는 시점이 바로 여기다. 도무지 경기 출전이 어려울 것으로 보였던 Reed는 7차전, 닉스 유니폼을 입고 코트로 돌아왔고, 점프볼을 직접 해냈으며 닉스의 첫 2골을 자신이 직접 성공시켰다. 이것이 그 날, Reed가 해낸 플레이의 전부였지만, 결국 닉스는 113-99로 승리하며, 프렌차이즈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그리고.. Baylor는 자신의 마지막 NBA 파이널 무대에서 또 다시 좌절했다.

70-71 시즌, 단 2경기 출전에 그쳤던 Elgin Baylor는 자신의 무릎 부상에 대한 플레이의 한계를 느끼고, 71-72 시즌, 초반 9경기만을 출전한 채 결국 은퇴를 선언한다. 8차례나 NBA 파이널 문턱에 도전했으나 단 한 차례의 우승도 해보지 못한 그가 코트를 떠나겠다는 힘든 결정을 내린 것이다. Baylor는 1958년, NBA에 데뷔한 이래 14 시즌동안 평균 27.4득점, 13.5리바운드, 4.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에겐 챔피언쉽 링이 없었다.

Baylor의 불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레이커스가 71-72 시즌, 현재까지도 NBA 기록으로 남아있는 정규 시즌 33연승 행진을 달리는 등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 결국 뉴욕 닉스를 NBA 파이널에서 물리치며, 로스 엔젤레스로의 연고지 이전 후 첫 번째 NBA 우승을 차지했던 것이다. Baylor가 은퇴를 선언한 바로 그 시즌에 말이다.

'Celtic Pride' 시대에 NBA 최고가 되려 했던 사나이, 그리고 무려 8번이나 NBA 파이널에서 패배를 맛봤던 사나이. 그가 바로 Elgin Baylor인 것이다. Charles Barkley보다 불쌍한 어느 위대한 선수의 소개를 그의 짧은 성적표 정리와 함께 마치고자 한다. Elgin Baylor. (6-5, 225 lbs, F)

1958-59 시즌 NBA 신인왕

ALL-NBA first team 10차례 선정

NBA ALL-Stars 11차례 선정

1958-59 시즌 NBA 올스타전 공동 MVP (with Bob Pettit, 세인트 루이스 호크스)

NBA 파이널 단일 경기 최다 득점 기록 보유 (61)

NBA 역대 통산 득점 22위

등번호 22, LA 레이커스 공식 영구 결번

1976년, 네이스미스 메모리얼 명예의 전당 헌액

1980년, NBA 35주년 팀 선정

1996년, NBA 50주년 팀 선정

우승 경험… 없음

P.S : 60년대 후반 레이커스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Wilt Chamberlin, Elgin Baylor, Jerry West는 순서대로 지난 1957년부터 59년까지의 NCAA 토너먼트 MVP였다. 물론, 그들이 각각 이끌던 팀은 토너먼트 결승에서 모두 패했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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