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최화경/십자군과 성전

  • 입력 2001년 9월 20일 18시 22분


십자군(crusade)이 처음 원정을 떠난 것은 1095년이었다.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이슬람의 지배 아래 있는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으려고 기독교도 군대를 소집하자 유럽 각국 기사단이 성전(聖戰)의 기치를 들고 출전했다. 원정군은 3년 뒤 난공불락의 요새로 불렸던 안티오크를 함락하고 이듬해 예루살렘까지 손에 넣었다. 1270년까지 200년 가까이 이어진 십자군 원정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십자군 원정은 8차례나 계속됐다. ‘로빈 후드’ ‘아이반호’ 등 소설과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는 3차 원정군을 이끈 실제의 인물이다. 당시만 해도 전쟁의 승자는 으레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기에 십자군 원정이 피의 기록으로 점철됐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3세기에 걸친 원정은 결국 실패로 막을 내린다. 오늘날 서방세계에 뿌리박혀 있는 이슬람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실은 십자군 원정의 실패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영한사전을 들춰보면 ‘crusade’에 두 가지 뜻풀이가 나온다. 하나는 십자군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이다. 서구인들이 십자군 원정을 얼마나 성스러운 전쟁으로 여겼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서구인들의 시각이다. 입장을 바꿔 이슬람권의 눈으로 보면 십자군에 맞서 싸우는 것이 성전일 수밖에 없다.

▷미국에 대한 테러 이후 십자군과 성전이란 두 단어가 유난히 많이 들린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 세력을 ‘악을 행하는 자’로 규정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십자군의 성전에 비유했다. 이슬람의 성전을 뜻하는 ‘지하드’는 ‘너희들에게 도전하는 신의 적들을 퇴치하라’는 코란의 구절에서 나온다. 이슬람권에선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돕는 미국,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던 구 소련과의 전쟁 등을 모두 성전이라고 부른다. 이번 미국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은 기독교 세계에서 발원한 단어인 십자군을 끌어다 아예 ‘이슬람 십자군’을 자처하고 나섰다. 미국의 십자군과 빈 라덴의 십자군이 서로 성전의 기치를 세우고 일전불사를 외치고 있는 형세다. 현대판 ‘십자군 전쟁’이라고 해야 할까.

<최화경논설위원>bb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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