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진/"금감위 압력? 말해야 아나"

  • 입력 2001년 9월 10일 18시 22분


현대증권이 미국 AIG컨소시엄에 넘겨줄 우선주의 발행가격을 놓고 벌어진 해프닝은 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현대투신증권의 외자유치 협상을 도맡은 금융감독위원회는 8월23일 “AIG컨소시엄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현대증권은 이사회를 열고 ‘우선주를 주당 8940원에 발행’하기로 결정해 금감위 발표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AIG가 하루 만에 태도를 바꿔 우선주 발행가 7000원을 고집함에 따라 현대증권이 협상 테이블에 끌려들어 갔다. 금감위는 “우선주 발행가는 현대증권이 결정할 사안”이라며 발을 뺐다.

현대증권 이사진은 지난달 30일 “발행가를 낮춰달라는 요구는 주주 재산권을 해칠 수 있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했지만 8일 오후 ‘발행가 7000원에 의결권 있는 우선주를 발행해 AIG측에 넘길 것’이라며 기존 방침을 번복했다. 새로운 합의는 ‘현대증권 주가가 7700원 이하가 되는 시점에 다시 이사회를 열어 새로운 발행가를 정한다’는 희한한 내용. 현행규정상 제3자배정 유상증자에서 10% 이상 할인 발행이 금지돼 있어 이를 피해가려는 고육책이다.

현대증권이 며칠 만에 물러선 것은 금감위의 압력 때문이다. 현대증권의 한 임원은 ‘정부의 요구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내 입으로 (압력이) 있었다고 꼭 얘기해야겠느냐?”고 되물었다.

우선주 발행가가 7000원이 된다고 해도 소액주주들의 반발과 이들을 지원하는 참여연대의 소송제기 등이 기다리고 있어 사태 해결의 앞길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이번 사건은 ‘한국식 시장경제’의 몇가지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다.

1.정부가 누르면 민간은 한다. ‘협상 주체’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2.그러나 정부의 대외 협상력은 여전히 한심한 수준이다.

3.부실을 안고 있는 쪽은 항상 약자다. 강자는 어거지를 부려도 통하기 마련이다.

4.한국에서는 소액주주가 다른 기업의 부실을 책임지는 이상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이진<금융부>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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