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석준/진정한 '국민 상대 정치'란

  • 입력 2001년 9월 4일 18시 37분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 건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뒤 정국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이념과 뿌리가 다른 두 정당이 대선 막판에 오로지 정권 획득을 위해 무리하게 연대해 집권에는 성공했으나 국정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내각제 약속 파기에 따른 갈등, 16대 총선 과정에서의 대결, 대북정책과 각종 개혁 입법에 대한 이견, 총선 이후 DJP 공조 복원과 기상천외한 ‘의원 꿔주기’, 각종 공직 나눠먹기와 무자격 인사 시비, 두 정당의 정체성 시비 등이 결국 현재의 국정 혼란을 가져온 원인들이다.

‘8·15 평양 민족대축전’ 사건이 이렇게 파국으로까지 발전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다. 임장관 문책 문제가 처음 제기됐을 때만 해도 수습이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임기를 1년 반 남겨둔 민주당과 자민련의 복잡한 내부 상황이 결국 파국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민주당의 경우 급속한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이 당 내부에서부터 확산돼 국정 운영 능력이 최근 크게 약화됐다. 최근에는 당과 청와대 사이에 대결 양상까지 나타나는 등 집권당으로서의 단합된 모습마저 잃었다. 결국 장관 개인의 문책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을 대통령 자신과 집권당이 대북정책 문제로 확대하고 심지어 ‘민족적 역사적’ 문제로까지 격상시켜 일을 그르친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민주당과 자민련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이들이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정국은 판이해질 것이다. 예상되는 선택은 몇 가지로 압축된다.

대통령과 민주당은 ‘여소야대’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해 보혁 구도로의 정계 개편이나 당정 개편에 이은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정치’를 선택하거나, 기존 정치 구도 위에서 한나라당과의 ‘상생 정치’ 및 자민련과의 ‘선택적 공조’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선택 과정에는 국정운영 능력이나 자신감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전자를 선택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언론정국’을 통해 지지세력 결집과 ‘보혁 편가르기’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이는 지역주의에 기반한 DJP연합에서 개혁주의를 바탕으로 한 ‘개혁연대’로 지배 세력의 골격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일견 이런 선택이 ‘망국적인 지역주의’를 ‘선진 정치적인 개혁주의’로 대체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정치’가 보혁구도의 확대 재개편과 ‘시민단체를 동원한 정치’로 변질돼 ‘포퓰리즘’과 ‘홍위병’ 논쟁이 재연된다면 정부 여당의 국정 운영 자체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혹시라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답방과 대북정책에서의 남북공조를 통해 북한을 국내 정치 질서 개편에 이용해 그동안 제기된 ‘답방 시나리오’의 실현을 시도한다면 그 결과는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불행한 사태로 전개될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제 남은 임기 동안 자신의 선택 폭이 넓지 않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첫째, 대통령은 단임 대통령으로서 대북정책, 경제 및 민생에 집중해 자신의 역할을 마무리해야 한다. 5년 임기 가운데 남은 1년 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기간이 아니라는 점을 아쉽겠지만 인정해야 한다.

둘째, 야당과의 상생의 정치 및 여야 영수회담 정례화, 국회 기능 활성화 등에 대한 선택이 필요하다.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정치’도 여야 정당, 국회, 정부기구 등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라야 그 효과가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셋째, 당정 대개편에서 국가적인 인재 등용이나 제도적인 국정 운영을 통해 오늘의 난국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온건파 중심의 명망 있는 검증된 인재들을 거국적으로 등용하는 실질적인 ‘조각’을 할 때 김대통령의 국정 운영 능력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이제 명실상부한 ‘김대중 정권’을 구성하고 야당과의 협력을 토대로 상생의 정치를 펴나갈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을 상대하는 정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오기’를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국민의 속마음과 역사의 흐름을 겸손하게 읽어야 할 때이다.

김석준(이화여대 교수·정치학·비전@한국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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