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영균/관치금융의 유혹 떨쳐라

  • 입력 2001년 9월 2일 18시 32분


요즘 은행사람들을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게 있다. “은행이 수수료를 올리거나 예금금리를 낮춰 이익을 늘리는 것을 비판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이다. 은행들이 이익을 내지 못해 손실을 내면 결국 나중에 공적자금이 들어가고 국민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온다는 논리다. 옳은 말이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 부실을 수십조원의 혈세로 털어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런 은행 움직임을 막을 방도도 없다. 은행을 이용하지 않을 용기가 있다면 모를까, 월급을 받아도 은행을 통하지 않을 수 없는 터에 큰소리칠 만한 계제도 아니다.

그러나 ‘은행 부실의 원인은 부실기업이고, 그 책임은 잘못 대출해준 은행과 감독을 게을리한 금융감독원 및 정부에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은행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과거 은행은 자율적으로 대출을 결정할 수 없었다’고. 은행에 주인이 없었고, 정부가 인사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란다.

6조원 규모의 자금을 더 지원해도 살아나기 힘들다는 하이닉스반도체가 바로 그런 사례가 아닌가. 은행들은 부도를 내자니 그 동안 꿔준 돈을 날려야 할 판이고, 더 돈을 대주자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까 걱정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미국이 ‘한국정부가 간섭하지 말라’고 나섰다. 정부는 채권단의 결정에 맡긴다며 한발 물러섰다. 그래서 오늘 채권단 대표들이 모여 지원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채권단이 과연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까. 채권단을 구성하고 있는 금융기관 중 상당수가 국영화된 마당에 은행장들이 관리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결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달 28일 김대중 대통령이 “금융기관의 정부소유를 종식시키라”고 경제팀에 지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

민영화란 ‘관에서 운영하던 것을 민간의 경영체제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여러 유형의 민영화가 있다. 소유와 경영을 모두 민간에 넘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소유는 민간에 넘기되 경영은 사실상 정부가 맡는 방식도 있다. 우리는 주로 후자가 많다. 민영화는 시늉만 내고 정부가 좌지우지한다.

때마침 재정경제부가 공청회에 부친 은행법 개정안이 나왔다. 앞으로 재벌도 자격만 갖추면 은행을 경영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은행을 인수해서 경영할 만한 자격을 갖춘 재벌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김영삼 정권 때도 이른바 ‘금융전업가’에게는 은행을 소유하고 경영할 수 있게 한다고 했으나 공염불로 끝나고 은행경영은 부실로 치닫고 결국 외환위기를 맞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새로운 시도도 필요하다고 본다. 관치금융의 실패를 여러 차례 반복한 마당에 실질적인 ‘민간은행’을 도입해 봄직도 하다. 우리보다도 금융이 낙후됐다고 하는 일본에서도 전자회사인 소니와 유통업체인 이토욧카가 은행업에 진출했다고 한다. 비록 사이버뱅크이기는 하나 국내에선 사이버뱅크도 기존 은행이 아니면 할 수 없게 돼 있다. 다만 외국자본만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을 뿐이다. 정부는 아직도 은행을 관치의 대상으로 삼고, 앞으로도 관치의 대상에서 제외하기 싫은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박영균<금융부장>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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