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비단길 전성기 10人을 만난다 '실크로드 이야기'

  • 입력 2001년 8월 3일 18시 34분


'실크로드 이야기'/수잔 휫필드 지음 김석희 옮김/320쪽 1만2000원 이산

둔황은 단숨에 천년 전 역사로 빠져들게 하는 동서문화의 대화랑 같은 독특한 도시이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막고굴 벽화 중에 조우관(鳥羽冠)을 쓴 삼국시대 사신이 그려져 있어 서역 만리까지 닿은 우리 조상의 꿈이 헤아려지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나는 막고굴 237굴의 ‘유마경변상도’에서 조우관을 쓴 삼국시대 사신을 발견하고는 몸을 떨기까지 했다.

실크로드나 둔황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아직도 미흡하다. ‘왕오천축국전’을 집필한 신라승 혜초나 중국승 현장의 흔적이 남아 있는 ‘비단의 길’ 정도로만 알고 있다.

실크로드는 우리에게 수박이나 호도, 살구 같은 과일에서부터 후추가루 같은 조미료는 물론 장기 등 온갖 문화를 흘려보낸 거대한 강줄기이고, 둔황의 막고굴은 천축을 오간 우리 구법승들의 그림자가 어딘가에 어려 있을 법한 유적의 궁전인데 지금도 그 연구는 미지근한 것이다. 이미 몇 십년 전부터 중국이나 유럽 학자들에 의해 둔황학(敦煌學)이 탄생하여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영국의 둔황학자인 수잔 휫필드가 집필한 ‘실크로드 이야기’도 그러한 학문적 성과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은 실크로드 역사와 문화를 깊이 통찰하고 있는 저자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저자가 중국 중심의 사관에서 벗어나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마음을 놓이게 한다.

이 책 ‘실크로드 이야기’는 서기 750년부터 1000년까지 동부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를 따분해지기 쉬운 논리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소설적인 기법으로 서술하고 있다. 즉 소설의 주인공처럼 상인과 병사, 목부, 공주, 비구, 기생, 비구니, 과부, 관리, 화공 등 10명의 개성적인 인물을 등장시키어 그들의 눈을 통해 당시의 생활사를 복원하고 있다.

책을 정독하고 나니 우선 두 가지가 선명하게 잡힌다. 하나는 대상(隊商)이나 승려, 전쟁의 병사들이 오갔던 남로나 북로로 일컬어지는 실크로드의 경로가 분명하게 잡히고, 또 하나는 8세기 중반에서 250년간이긴 하지만 실크로드를 배경 삼아 각축전을 벌인 소수 민족들의 흥망성쇠가 이해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책을 ‘역사서가 아니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지만 나는 그 어떤 역사서보다 방법론적으로 성공했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책의 후반부인 7장에서 10장까지는 비구니와 과부, 관리와 화공을 통해 당시 둔황의 종교의례나 관혼상제 등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다. 둔황을 두 번이나 다녀온 나로서는 새삼 흥분되고, 다시 그곳을 여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이 막고굴에 가서 참배하고 벽화를 감상하거나, 모래로 이루어진 명사산 자락에서 미끄럼을 타고, 그 산 계곡의 불당 아래 형성된 월아천 주위를 산책하는 일 등은 천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병사 이야기’도 고구려 출신의 명장 고선지 장군의 활약상이 작전상황도와 함께 박진감 넘치게 묘사되고 있어 저자의 글 솜씨가 부럽기까지 하다. 다 알다시피 고선지 장군이 1만의 병사를 이끌고 험난한 파미르고원을 넘어 다른 중국 장수들이 세 번이나 연패한 티베트와의 전쟁에서 대승한 것을 두고 전쟁사가들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알프스산맥을 넘은 것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사가들은 주변국을 호(胡)나 이(夷)를 붙여 기록해 왔지만 이 책의 저자는 문화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공주 이야기‘에서는 당나라가 위구르와 우호관계를 맺고자 자국의 공주를 볼모로 보내는 사건이 나오며 ‘목부 이야기‘에서는 위구르로부터 원병을 받은 당나라가 조공을 바친 사실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티베트도 마찬가지다.

다만 아쉬운 점을 하나 들라고 한다면, 우리 학계가 연구해야 할 몫이어서 저자가 양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크로드나 막고굴에 얽힌 우리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빠진 점이다. 파미르고원에서 호랑이처럼 활약한 고선지 장군의 이야기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 도서 상세정보 보기 & 구매하기

정찬주(소설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