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포럼]이병훈/과학은 박물관서 자란다

  • 입력 2001년 7월 26일 18시 22분


‘한 개의 시험관은 전 세계를 뒤집는다. 과학의 승리자는 모든 것의 승리자다. 과학의 대중화운동을 촉진하자.’

이것은 1934년 4월 19일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의 날인 ‘과학데이’의 구호이다.

당시 서울에서는 800여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거행됐고 그 해 7월 5일에는 ‘과학지식보급회’가 여운형 송진우 김성수 김활란 등 민족 지도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됐다. 과학지식보급회는 발명학회에서 운영하던 ‘과학조선’을 인수하고, 지방순회 강연회를 하면서 조선 과학대중화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에 앞서 1920년 4월 29일자에 실린 동아일보 사설을 보자. ‘과학의 발달을 도모함에는 왕성한 연구심, 냉정한 객관적 태도, 귀납적 방법의 사용, 실험, 일반사회의 학자 우대 등이 필요하다. 그런즉 신시대를 당한 우리 조선은 위선 학교에서 수학과 물리 화학과 또 널리 지식을 구하는 외국어 등에 일층 힘을 더하며….’

최근 일련의 과학대중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2년 전에 이용수 박사가 지식층을 중심으로 과학독서아카데미 운동을 펼치더니 최근엔 김수환 추기경을 필두로 과학기술부장관이 앞장서 ‘사이언스북 스타트 운동’을 시작했고, 다시 포항공대의 기초과학 문화포럼이 ‘국민을 생각하는 과학기술 국민 대토론회’를 열었다.

과거 박정희 정부 때의 ‘전 국민의 과학화’나 그 후의 ‘과학기술 국민 이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초의 ‘과학데이’ 이후 본격적으로는 거의 60여년 만의 일이다.

어쨌거나 그 사이의 운동들은 이렇다고 할 만한 결실을 보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제 과학의 대중화나 국민의 과학화의 방법론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사실상 그 동안의 과학의 대중화는 주로 언론매체, 강연회, 독서, 그리고 특별한 행사 위주로 이뤄졌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보고 만지고 느끼고 실험해 보는 체험적 과학행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일정한 상설시설에서가 아니라 일과성이었다. 이제 이러한 단계를 한층 높여 보다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참여의 대안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해답은 바로 자연과 과학기술에 관한 박물관들이다. 이들은 과학적 연구의 과정과 결과, 그리고 기술적 발명과 발견들을 전시와 교육을 통해 대중에게 알리고 이들이 인간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가치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선택하도록 도와준다.

그 과정에서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그 작용이 얼마나 절묘하게 얽혀 있고 그래서 전 지구계의 구성 요소들이 얼마나 서로 밀접하게 연계돼 있는지 알려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과학이 신비와 전설이 아니라 각자가 체험하고 해낼 수 있는 보통사람의 능력임을 알게 된다. 더더욱 뜻 있는 일은 이러한 박물관들이 바로 지식과 정보의 생산현장이며 교육현장이고 영감을 얻어 자유롭게 상상하는 창의적 발상의 현장이라는 점이다. 바로 대중과 과학의 접점이며 과학 대중화의 현장이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립자연사박물관에는 올해에도 1000만명의 관람객이 몰리고 있다. 시카고의 유명한 과학산업박물관이 처음 설립된 것은 실업가 줄리어스 로젠왈드가 1911년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독일 뮌헨의 도이치박물관에 갔다가 아들이 없어져 구경에 정신이 팔린 아들을 찾느라 혼이 났다는 일화가 계기가 된다.

그 후 1933년에 개관된 이 박물관에는 지금도 연 300만명의 관람객을 자랑하며 교사들은 과학놀이에 몰두하여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을 찾느라 애를 먹고 있다.

이러한 자연과 과학기술 박물관들이 이웃 일본에만도 400개가 넘게 있다. 그러나 우리는 10개도 안 된다. 과학의 대중화를 상설활동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먼저 생각하여야 할까. 과학 박물관이 없는 ‘과학의 대중화’가 어쩐지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우리가 그렇게도 목말라하는 노벨상도 나라별 자연과학 박물관 수에 비례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병 훈(전북대 교수·생물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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